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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여자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침실, 옷방, 남편 서재... 내 방은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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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책을 펴낸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에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을 나눕니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1.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 페미니스트야” 

2. “당신, 페미니즘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3. 돈 벌어오라는 남편, 그래서 나갔다 

4.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엄마가 아니야

출처ⓒ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처음에는 내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을 생각하면 부엌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당연하게 떠올렸다. 남자는 거실에서 쉬거나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차려진 식탁 앞에 앉는 모습을 생각했다.


집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가사노동과 육아뿐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자기 삶, 자기 자아 대신에 자녀의 삶, 남편의 삶을 채워 넣는다고. 그들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이룬다고. ‘맘카페’에는 가족과 집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부부는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서 살고 있었다. 안방, 옷방, 남편 서재만 생각하던 나는 아내분의 방을 보고 놀랐다. 그분의 책과 물건, 사진 등으로 꾸며진 공간을 보며 이것저것 궁금하기도 했고, ‘여자도 집 안에 공간을 따로 만들 수 있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도 집 안 적당한 곳에 내 서재를 꾸며 보면 어떨까 상상하기 시작했다.

집이지만 쉴 수 없었다

출처ⓒ일본 TBS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새로 짓는 아파트를 홍보할 때 대부분 부엌의 세련된 모습과 넉넉한 수납공간을 자랑하며 ‘여자의 취향을 고려했다’고 표현한다. 집안일은 보통 여자가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드는 건 먹고살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며 수납공간에 물건을 정리하는 것 역시 기본적인 일이다.


‘여자는 집에서 살림과 육아에 힘써야 한다’는 메시지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텔레비전을 보아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을 봐도 여자의 노력으로 살림이 꾸려지곤 한다. 그렇다 보니 집은 여자인 나에게 일터와도 같았다.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을 매일 반복하는데 휴가도 없고 임금도 받지 못하는 일터. 


늘 집을 관리하고 가족을 챙기다 보니 내 삶은 지워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과도 내 이야기보다는 아이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됐다. 집을 생각하면 쌓여 있는 집안일부터 생각했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일은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서재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간이었다. 책은 누가 더 많이 읽을까? 실제로 남자가 여자보다 책을 더 좋아할까? 확인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결혼한 여자보다 결혼한 남자에게 책 읽을 시간이 더 많다는 점이다. 대체로 육아와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사실이다. 나 또한 하루 종일 쉴 틈이 없고 시간이 생겨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책 읽을 힘이 없을 때가 많았다. 


이 사회는 여자에게 육아와 집안일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라고 가르쳐 왔다. 요즘도 여자에게 권하는 책은 요리나 살림 관련 서적, 육아 서적이 대부분이다. 나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자 그런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책은 남편이나 아이가 읽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히려 내 공간과 시간을 챙기며 책도 읽고 글도 쓰려고 애쓰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누리는 삶을 나도 똑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서재가 나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나만의 서재를 만들다

▲ 피터 빌헬름 일스테드 ‘Girl Reading a Letter in an Interior’(실내에서 책 읽는 소녀)(1908)ⓒPeter Vilhelm Ilsted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했다. 나는 옷방의 옷과 물건들을 정리한 뒤 큰 책장과 책상을 사서 옷방을 나의 서재로 만들었다. 내가 고른 책을 꽂아두고 책상 옆에 사진엽서도 붙였다. 남편은 전부터 내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노력했다. 내가 나의 서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도 나를 응원해 줬다. 방 정리를 같이 하고 창문에 아이보리색 커튼을 직접 달아줬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 집에 내 서재를 만드는 일인데도 자책했다. 다른 여자들은 자기 공간 없이도 잘 사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공간을 욕망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일까를 의심하며 주변 사람들을 의식했다. 여자가 집 안에 따로 공간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었다. 내 공간을 갖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통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 뜻대로 내 서재를 만들었다. 이젠 그곳에서 책도 읽고 생각도 한다. 내 방에 있는 동안은 집안일에 대한 압박 대신 편안함을 느꼈다. 내 공간을 만들자 집에서도 쉴 수 있게 됐다. 나의 서재는 집에서 가장 소중한 공간이 됐다. 집 안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생기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즐거워졌다. 


아기 친구 엄마들이 놀러 오면 내 서재부터 데리고 가서 보여줬다. 서재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남편 방과 내방이 따로 꾸며진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꼭 하나의 방이 아니라도 좋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나의 경우에는 내 서재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책을 읽고 글도 쓰면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내가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나는 잘 꾸며진 부엌이나 옷방 대신 읽고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원한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를

집안 일과 육아를 하고 살다 보면 내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다. 가끔 쓰지 않는 물건도 쌓인다. 하지만 내 공간이 있으니 의식적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자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을 쓸모를 기준으로 나누고 쓸모가 적은 것을 다 없앨 수는 없다. 그 쓸모가 분명하지 않아도 그 존재 가치가 빛나는 것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또한 나로서 살아가는 삶을 욕망한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 말은 멋지지만 실제로 이루기는 어렵다.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도 있기에 힘든 길이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집 안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면서 예전보다 자유로워졌음을 느낀다. ‘여자인 내가, 엄마인 내가, 아내인 내가 이런 걸 가져도 되는 거야?’라고 속으로 되뇌던 의심이 사라졌다. 나만의 서재를 갖게 되면서 오롯이 내 삶을 직시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공간은 지금 내 삶과 내 모습 그 자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이자 내가 딛고 서고 머무는 곳이다.

* 외부 필진 부너미 님의 기고 글입니다. (글 류원정)


**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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