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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각지 기생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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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미년 3·1운동에는 진주, 수원, 해주, 통영 등의 기생들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3·1 만세운동은 특정 날짜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제로 장장 두 달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번져나간 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의 총 시위 횟수는 2천 회 이상, 참여자는 연인원 2백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도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는 4만 7천여 명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각 지역으로 확산한 만세 시위운동의 주력은 무명의 민중들이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에는 모두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과 4월 2, 3일은 50회 이상 일어났으며 적어도 30회 이상 일어난 날만 15일이었다. 


시위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시가지 대로 위의 만세 시위, 시골 장터에서의 만세 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시위, 한 장소에서의 1회성 만세 시위, 같은 장소에서 몇 차례 거듭된 시위운동,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행한 만세꾼들의 시위운동, 지역과 지역이 이어진 릴레이 시위가 그것이었다. 


또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행한 상여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 시위, 학생들의 동맹 휴학시위, 노동자들의 파업, 광부들의 순사주재소 습격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어린이와 거지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3·1 만세운동은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권번(일제강점기의 기생조합)에 소속돼 있었던 기녀들도 기생조합 통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생들은 다양한 예술적 기능과 학식을 갖춘 정통적인 예기에 해당하는 여성들로 당시 ‘사상기생’이라 불리었다.

‘사상기생’도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우리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경성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놀아나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8백 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라는 것이 옳을 듯했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

경성 장안 백여 처 요정은 불온한 소굴로 화해버렸다. 간혹 우리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 오는 일이 있어도 그 태도는 냉랭하기가 얼음장 같고 이야기도 않거니와 웃지도 않는다. 그 분위기야말로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다.”

- 1919년 9월, 일본 경찰 치안책임자 지바료가 총독부에 보고한 내용

이들의 모습이 당시 기생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향락의 상대’로 인식되는 기생과는 구별되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3·1운동 당시의 기생들 가운데에는 다른 이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칠 만한 정도의 민족의식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

경남 진주에서 기녀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19일이었다. 진주 지역의 걸인 백여 명이 “우리가 이렇게 못살게 된 것도 일제가 우리의 재산을 빼앗음이로다”라고 외치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전국에서 유일한 걸인들의 만세 시위(3월 16일) 사흘 뒤였다.


그날,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 5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를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논개의 후예다. 진주 예기의 전통적 긍지를 잃지 말라”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들의 투쟁을 본 ‘백정의 아낙’들도 육고에서 쓰는 칼을 들고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은 이들을 체포한 후 이마에 칼로 ‘에다(천민, 백정이라는 뜻)’라는 글자를 새기는 악랄한 짓을 자행했다. 일제는 한금화 등 6명이 붙잡아 구금했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 


3월 29일 수원 기생조합 기생들은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이때 김향화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뒤따르던 기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일본 헌병들이 병원으로 추격하자, 학생과 상인, 노동자 등 군중이 기생들을 옹위하며 병원을 에워싸고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다. 이 사건으로 김향화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4월 1일에는 황해도 해주의 기생들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기생조합장 문월선을 비롯해 김해중월·김월희·문향희·옥채주 등 5명이 기생들이 ‘남자의 힘을 빌지 말고 서로 합심 동체가 되어 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자’고 언약했다.

기생 만세운동, 수원·해주로 이어지다

독립선언서를 얻을 길이 없으므로 월희와 월선은 국문으로 글을 지어 시위 참여자에게 배포할 활판 인쇄물을 제작했다. 4월 1일 오전 10시 기생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에 “기생들도 독립을 위하여 몸을 바쳐 투쟁하는데…”하며 가정부인들도 떨쳐 일어나니 만세 대열에 뛰어든 사람들이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문월선·김해중월·이벽도·김월희·문향희·화용·금희·옥채주 등 8인이 구금돼 옥고를 치렀는데 이들은 형무소에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 통영의 기생 두 명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6월 실형을 선고받은 문서

▲ 기생 양성소 등 기생학교에 기생들이 교육받는 모습. 일제 시대 엽서 사진

4월 2일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통영에서 이어졌다. 정홍도·이국희 등 예기 조합 기생 33명이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을 사서 만든 소복 차림에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채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통영경찰서 앞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합세했다.

“독립운동은 본부(本夫)를 찾아 섬기는 것

이 시위를 주도한 정홍도(본명 정막래)는 스물한 살, 이국희(본명 이소선)은 스무 살이었다. 이들은 재판정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다음은 <통영시지(市誌)>에 전하는, 이들이 법정에서 판사와 나눈 대화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물론 본부를 섬겨야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통영시지>에 따르면 이들의 말에 “판사는 답변을 못하고 곧 퇴정하였다”고 한다. 정홍도와 이국희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지난 2008년 정부는 재판 기록을 근거로 두 사람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 기녀들의 만세운동은 3·1 운동기 반상과 신분의 귀천을 넘어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동등한 주체로 국권 회복에 나선 전 민족적 저항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준다. 크고 작은 희생이 뒤따랐지만, 이 같은 투쟁의 집적이 다가올 광복과 이어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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