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모르는 '대한늬우스'의 역사

조회수 2019. 1. 4. 12: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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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부터 1994년 12월 31일까지 제작됐다.
▲ <대한뉴스>는 TV 보급이 보편화 되기 전 국정을 홍보하기 위해 방영한 영상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1994년의 마지막 날 대한민국 정부가 1963년부터 제작해 영화관에 보급, 상영했던 <대한뉴스>가 종영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때는 대중매체에 소외돼 있었던 국민에게 뒤늦게나마 뉴스를 공급함으로써 소임을 다했던 이 ‘관제’ 뉴스는 2040호를 끝으로 종영했다.

<대한뉴스> 종영, 관제 뉴스의 종언

<대한뉴스>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집집이 텔레비전 등의 매체가 보급되고 인터넷 시대가 가까워졌는데 이미 보고들은 뉴스를 강제로 다시 보게 한다는 지적이 뒤따르면서였다. 1994년 8월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폐지하는 영화진흥법안이 최종 확정된 데 이어 이날 <대한뉴스>는 마침내 종영된 것이었다.


<대한뉴스>는 TV 보급이 보편화 되기 전, 국민에게 나라 소식을 알리고 국정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국정 홍보를 위해 일방적으로 전달된 영상물이기는 해도 <대한뉴스>는 광복 이후 우리 역사를 2,040회에 걸쳐 영상으로 꼼꼼히 기록한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오늘날 영화관에서는 광고와 영화 예고편에 이어 본 영화를 상영한다. 그러나 1994년까지 관객들은 본 영화에 앞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해야 했고 이어진 <대한뉴스>를 반드시 관람해야 했다. 


그것은 누대에 걸친 권위주의 정부에는 맞춤한 홍보 방식이었다. 텔레비전 영상의 수용은 시청자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극장에서 애국가와 함께 치러지는 국민의례와 정책홍보·선전 일색의 <대한뉴스>의 수용은 관객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에 도입된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이 1989년에 폐지된 데 이어 1963년에 극장 동시상영이 의무화됐던 <대한뉴스>마저 마침내 종영된 것이었다.

<대한뉴스>의 출발은 1945년 10월부터 미군정청에서 제작, 공개했던 <조선시보>다. <조선시보>는 광복을 맞아 환호하는 군중과 미군의 도착,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모습 등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시보>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신설된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에 편제되면서 <대한전진보>로 이름을 바꿨다. 흑백필름으로 월 1회 제작됐던 <대한전진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시 중단됐다. 

한국전쟁 초기 빼고는 주 단위로 중단없이 제작

<대한전진보> 제작이 재개된 것은 1952년 1월 피난 수도 부산에서였다. 이때 다시 제호를 <대한 뉴-스>로 고치고 16mm 필름으로 월 2~3회 정도 부정기적으로 제작됐다. 전쟁 중이었지만 <대한 뉴-스>는 이동 영사반이 지방을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상영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찾아가는 뉴스’였던 셈이다.


<대한뉴-스>는 1954년 11월 제48호부터는 <대한늬우스>로 개명해 매달 1편씩 제작됐다. 1960년에는 외래어의 한글 표기법이 바뀌면서 <대한뉴우스>로 제목을 변경했고 재일동포용 뉴스 ‘한국소식’을 매월 1편 제작 배포했다.

출처: ⓒKTV
▲ <대한뉴스> 560호. 베트남전에 참전할 당시에 <대한뉴스>에서는 ‘월남소식’ 꼭지를 따로 뒀다.

<대한뉴우스>가 천연색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외래어 표기법이 개정되면서 1978년에 다시 <대한뉴스>로 개명됐다. <대한뉴스>는 1980년 3월에는 <시네마 순보>로 바꾸고 15일에 한 편씩 제작되기도 했지만 불과 3개월 뒤에 <대한뉴스>로 환원됐다.


애당초 국정 홍보가 목적이었던 <대한뉴스>는 한국전쟁 초기를 제외하고 주 단위로 쉬지 않고 제작됐다. 1952년 6·25전쟁 중에는 정부에서 각 도 공보과에 필름프린트를 몇 부씩 보내 더 많은 국민이 관람할 수 있도록 광장이나 주요 영화관에서 무료로 상영하게 했다고 한다.

1963년부터 극장 동시상영 의무화

1959년 4월부터는 매달 두 번 ‘영화의 날’을 정해 2편의 <대한뉴스>와 정부에서 만든 문화영화, 기록영화 등을 묶어 상영했다. 국정을 홍보하고자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꽤 애를 쓴 것이다.


<대한뉴스>는 196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애국심 고취’와 ‘계몽’이라는 취지로 애국가, 문화영화와 함께 극장 동시상영이 의무화됐다. 이후 1994년까지 31년 동안 <대한뉴스>는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이 의무적으로 관람해야 하는 의식이 됐다. 


내가 <대한뉴스>를 처음 만난 것은 1년에 한두 차례씩 들어와 전을 폈던 가설극장에서였다. 아마 베트남전에 전투병이 파견되기 시작한 1965년 이후부터 한국군 철수가 완료된 1973년까지였을 것이다.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대한뉴스>의 ‘월남소식’ 꼭지를 관람하면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곤 했다. 


베트남전의 성격이나 한국군의 참전이 어떤 뜻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던 시기에 월남의 정글에서 들려오는 승전보는 어린이들을 감격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갈리는 전쟁터라기보다 우리가 늘 편을 지어서 벌이던 전쟁놀이의 연장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관련 글: 1971년 12월 9일, 베트남으로부터의 귀환


어쨌든 <대한뉴스>는 5, 60년대 변변한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나라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영상 뉴스로 소임을 다했고 인기도 높았다.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태생적 한계 탓에 <대한뉴스>는 정부 정책이나 권력자 홍보에 치중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주요 맥락을 매주 영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출처: ⓒKTV
▲ <대한뉴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박정희가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문무대를 방문했다.(1095호)

대한뉴스, 영상으로 기록된 우리 현대사

<대한뉴스>가 남긴 영상은 말 그대로 우리의 현대사다. 광복 직후의 환희와 6·25전쟁의 참상, 4·19혁명과 5·16쿠데타, 베트남전 참전, 경부·호남고속도로 개통, 10·26과 광주항쟁, 6·10 민주 항쟁,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했다. 


1970년대에 집집이 TV를 장만할 수 있게 되면서 <대한뉴스>의 인기는 가파르게 떨어졌다. 집에서 편하게 최신 뉴스를 시청할 수 있는데 주 단위로 만들어져 이미 구문이 된 뉴스를 극장에서 강제로 보아야 하는 일은 고역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부독재 정권이 이어지면서 관객들은 정권 홍보로 일관하는 <대한뉴스>를 외면했다. 


결국 <대한뉴스>는 1994년 12월 31일에 2,040회를 끝으로 종영하고 제작을 중단했다. <대한뉴스>의 종영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뉴스를 공급하던 시대의 종언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한 방향으로 주어졌던 <대한뉴스>는 이후 도래한 양방향으로 소통되는 인터넷 뉴스에 바통을 넘겨주고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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