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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간에 배운 '시일야방성대곡' 필자의 소름돋는 반전

조회수 2018. 11. 26. 11: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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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판 대신 '개돼지'라 꾸짖다 결국 친일파가 된 장지연
▲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아래 칸에는 ‘5조약청체전말’이라는 제목으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사설란에 한 언론인이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다.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의 이 논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1월 17일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대신들을 ‘개돼지’로 비유하며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토 히로부미)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한규설)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 김상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 소식에 자결을 시도한 정온)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암 장지연

이 유명한 논설을 쓴 이가 바로 위암 장지연(1864~1921)이다. 광복 이래 초중등학교 역사 시간에 달달 외어야 했던 이 이름은 사실 배반의 이름이다.


청음 김상헌과 동계 정온을 들며 비분강개했던 이 언론인은 10년도 지나지 않은 1914년부터 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인 매일신보 주필로 700여 편의 친일 한시와 사설을 쓴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이기 때문이다. 


사흘 전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첫 단계였던 이 조약의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다.

“이 날, 목놓아 통곡하노라”

‘을사늑약’은 을사년에 체결됐다. ‘을사협약’, ‘을사5조약’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60~70년대 국사 교과서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 배우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2000년대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 불평등 조약이라는 점을 강조해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관련 글: 1905년 오늘-을사늑약이 체결되다)


황성신문의 사장이자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규탄했다. 그는 을사오적을 “영달과 이익만을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두려움에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다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 ‘시일야방성대곡’은 황성신문 11월 20일 자에 실렸다.

그러나 조약 체결을 압박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는 “후작은 평소 동양 3국의 정족안녕(鼎足安寧)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이라…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내는데, 이토 후작의 처음의 주의(主意)는 어디에 있는고”라며 완곡한 비판의 뜻을 표하는 데 그쳤다.


당일 자 황성신문은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외에도 ‘5조약청체전말’이라는 제목으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평소 3천 부를 찍던 신문을 1만 부로 늘려 인쇄해 조약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오전 5시 신문사를 급습해 미처 배포되지 않고 남아 있던 신문들을 몰수하고 장지연을 비롯해 직원 10여 명을 경무청으로 압송해 구금한 후 무기한 정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다음 날 “’시일야방성대곡’이야말로 모든 대한제국 신민의 통곡”이라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해서 1면에는 ‘한일신조약청체전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고 2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실었다.


장지연은 구속돼 태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인 1906년 1월 24일에 석방됐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황성신문에 대한 정간 명령도 1906년 2월에 해제돼 2월 28일(음력 2월 7일)부터 복간됐다.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 장지연

장지연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호는 위암·숭양산인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궐기 호소 격문을 각처에 발송했고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기초를 잡기도 했다.


1897년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이듬해 9월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기자로 일했다. 11월에는 만민공동회의 총무위원으로 선임됐는데 곧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면서 체포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됐으나 곧 사임했다. 그가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이 된 것은 1901년이었고 이듬해에는 사장으로도 취임했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됐다. 경남일보는 1915년 1월 경영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지방신문이면서 전국 규모의 신문이었다. 경남일보는 1910년 10월 11일 자 ‘사조’ 란에 일제의 합병을 비난하며 8월 30일 자결한 매천 황현의 ‘유시’를 게재하고 평을 달았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신문지법 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됐다. 


경남일보는 10일 만에 복간되면서 논조를 친일로 바꿨다. 11월 5일 자를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호로 발행했는데 엇갈린 일장기와 오얏 문양으로 제호 위와 옆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봉축천장절’라 표기해 이를 기념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11년 11월 2일 자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얏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2단을 합친 전체 크기에 ‘축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를 무기명으로 게재했다.

“동쪽 바다 일본에서 해가 떠오르니 태양이 빛나는구나 / 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 / 보위에 오르신 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 /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 /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 /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년이 되어 영원하리라.”

1913년 경남일보 주필에서 물러난 장지연은 이듬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초빙을 받았지만, 매일신보의 사설은 아첨이 많고 숨기는 일이 많아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한 달여 뒤에 매일신보에 장지연을 ‘객경’(객원 간부)의 자리에 초빙했다는 ‘사고’가 실렸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초빙 뒤 친일 문필활동

1914년 12월부터 장지연은 실명으로 ‘고재만필-여시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18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고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돼 있다.


1910년대 매일신보는 식민정책과 관련한 각종 법령 제도를 일제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한 총독부 기관지였다. 언론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다양한 방면에서 식민주의적 관점을 관철해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근대성을 내세우거나 동화정책을 선전했다. 이밖에도 조선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 개발정책을 ‘시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매일신보에 발표한 1915년 1월 1일 자 ‘조선 풍속의 변천’에서 장지연은 조선총독부의 신정이 조선의 전통을 훼손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선의 풍속을 개선하는 존재라며 미화하고 찬양했다. 그는 또 일제와 총독부의 식민정책을 미화하고 장려와 지도를 원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조선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출처: ⓒ친일인명사전
▲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 자에 실은 「대정 6년 시사」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호라 동종동족(同種同族)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라. 아아! 슬프도다.”('송재만필 (9)-단체성이 흠결호', 매일신보, 1915.12.26.)라고 한탄했다.


그는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단체성이 없는 조선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인용하면서 같은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1915년 ‘신무’천황제일’을 맞아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신무는 영웅의 신명(神明)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해내(海內)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萬世ᅵ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만필쇄어(5)-신무천황제」, 매일신보, 1915.4.3.)

1918년 1월 1일 자 매일신보에는 ‘대정 6년 시사’라는 제목으로 매달 2편씩 총 24편의 한시를 실었다. 이 한시들은 1917년의 주요 사건들을 소재로 쓴 것인데 이 시편들에는 일본 천황의 ‘은혜’와 일제가 주도한 경제발전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식민지 농정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1917년 순종이 일본 천황 다이쇼를 만나러 간 것에 대해서는 ‘이왕 동상’이라는 시로 “이왕(순종)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라고 썼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동생인 영친왕 이은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일본 황실과의 결혼 내정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는 영친왕과 일본 황실의 결합을 통해 이왕가의 권위를 낮춰 식민통치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장지연은 “일선(日鮮)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한 것이다.

2대 총독을 ‘한겨울 매화’의 웃음으로 환영

1916년 12월 10일 자 매일신보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 ‘현대시단-환영 장곡천 총독’이 실렸다. 하세가와는 청일전쟁 때의 공적으로 남작에 올랐고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내면서 이토와 함께 ‘을사늑약’을 강요했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자 임시 통감대리를 지낸 인물이다.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 한수(漢水)의 풍연(風煙) 원래 낯이 익으니 / 한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
▲ 1916년 12월 10일 자 매일신보에는 한시 「환영 장곡천 총독」이 실렸다.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를 환영하면서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한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거기엔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커녕 식민지 지배자에 대한 인연에 대한 기꺼움만 가득했다.


장지연은 1921년 10월에 57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할 때 700여 편의 친일 한시와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이 확인되면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중 언론 부문에 수록됐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서훈 취소와 취소 무효화

이에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영예수여 및 취소안’이 심의·의결돼 서훈이 취소됐다. 하지만 2012년 1월 법원은 해당 서훈의 취소 결정을 다시 무효 처리했다. 법원은 “헌법과 상훈법에 훈장은 대통령이 수여하는 것으로 규정된 만큼 서훈 취소도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며 “권한 없는 국가보훈처장이 서훈을 취소한 것은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해 무효”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장지연의 친일 여부를 판단한 것은 아니다. 단지 법률적인 흠으로 말미암아 서훈 취소가 무효라는 것일 뿐이다. 실제 확인된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해석도 보혁 간에 엇갈린다. <친일인명사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편파적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양 진영의 엇갈린 시선이 식민지 역사 청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 엇갈린 인식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의 근원이다. 언제쯤이면 우리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합의가 온전히 이뤄질 수 있을까.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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