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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에 끌려가 일본군이 된 ‘마지막 황태자’

이은은 철저히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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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친왕 이은은 철저히 그림자의 삶을 살았다.

망국의 황태자에겐 자기 삶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됐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던 영친왕 이은(1897~1970) 이야기다. 1907년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은은 일본인으로 살았다.

▲ 1907년 황태자가 된 뒤 이은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일본의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1940년 육군 중장이 됐다. 그는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일본 패전 뒤에 예편됐다. 1947년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은은 일본 왕족의 지위와 국적도 잃었다.


1957년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고 아들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5·16 군사정변 후 1962년 12월 한국 정부에 의해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이 고시되면서 이듬해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광복 직후와 1948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요청했지만,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7년에 고국을 떠난 뒤 1926년에 일시 귀국한 적이 있긴 했으나 거의 56년 만의 환국이었다. 그러나 예순여섯의 나이, 병세는 깊어져 그는 거의 혼수상태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은의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고 순종과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와는 이복형제다. 1900년 영친왕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1907년 이복형인 순종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됐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이었을 뿐 그는 볼모로 끌려간 일본에서 사실상 일본인으로 살았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순종이 ‘이왕’으로 불리게 된 뒤에는 그도 ‘이왕세자’가 됐다.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제2대 이왕으로 즉위했으나 이미 그는 다스릴 나라를 잃은 망국의 왕족이었을 따름이다. 


일본의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그는 육군사관학교(1917)와 육군대학(1923)을 졸업했다. 1920년 일본의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 이름 이방자)와 결혼했다. 이은의 결혼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선전했고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은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며 ‘적자’라고 비난했다. 


1926년 순종에 이어 그는 이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31년 둘째 아들인 구를 낳았고 1940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패전 뒤에 예편했다.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은은 이왕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돼 일본 국적도 잃었다. 그것은 사실상 그림자처럼 살아온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신분의 변화였다. 


영친왕 이은이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까지 추진하며 반일 태도를 고수한 형 의친왕 이강을 제치고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건 일제의 영향 덕이었다. 그는 자기 뜻과 무관하게 일본 왕족과 결혼하고 일본군 장성으로 복무하는 등 일제에 철저히 순응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으로 가야 했을 때부터 그는 자신의 삶이 타의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 영친왕 이은과 마사코의 혼약을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 제국미술원 전람회의 조각 진열장을 둘러보는 이은과 마사코 부처(1933년)

일제에 순응한 삶 탓에 해방 뒤 그의 환국은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선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았으므로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해 그의 귀국을 거부했다. 반대로 일본 정부에서는 호적을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한국인으로 보았으므로 부부는 무국적 신분이 돼야 했다.


결국, 그는 1957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그것은 실제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가 형식적으로 일본인이 되는 마지막 절차였다. 아들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그는 1959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5·16 쿠데타 뒤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은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962년 12월 15일 한국 정부는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을 고시했다. 이은이 제기한 국적취득신청에 대해 서울지방법원의 허가 결정이 난 것은 1963년 3월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이은은 혼수상태로 환국해 곧장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가톨릭계 병원에 입원한 것은 병상에 있던 1961년에 도쿄에서 가톨릭 신부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도 했지만 상태는 악화를 거듭했다. 


1970년 5월 1일 새벽 3시 영친왕 이은은 전신경련을 일으킨 채 의식을 잃었다. 오전 7시 30분에 성모 병원에서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진 그는 오후 1시에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고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영원에 안장됐다.

▲ 낙선재와 그 뒷쪽 상량정. 1963년 환국한 이은은 창덕궁 낙선재에 살다가 1970년 5월 1일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그의 아내 이방자(1901~1989)는 29년 뒤에 그의 뒤를 따랐다. 장남 진(1921~1922)은 어려서 한국 방문 중에 죽었고 차남 구(1931~2005)는 미국 유학을 거쳐 건축가로 살다가 우크라이나계 미국인과 결혼했다. 1963년부터 창덕궁 낙선재에 생활한 그는 아내가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한 뒤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은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인데도 일본 육군에 복무했고 일본 황족과 결혼했으며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공족(公族)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 이해승, 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 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李鍝, 1912~1945 : 의친왕의 차남)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수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고 밝혔다. 


이은의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그에게 ‘의민’이라는 시호를 붙였지만 이는 문중에서 사사로이 붙인 것으로 공적 시호로 볼 수 없다. 그는 공식적으로 영친왕이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주권도 백성도 없는 2대 이왕이었을 뿐이다. 


적어도 대한제국의 왕족에게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열 살 때 사실상 인질로 이토를 따라 일본으로 가야 했던 이은에게는 그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할 수 있다. 아니, 성인이 돼서도 무기력한 삶으로 일관했던 그에게는 그 책임마저도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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