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일문학인이 '한글 포기'를 주장하며 얻은 것

조회수 2018. 9. 10.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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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들어 모시는 문학은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이다."
▲ 최재서의 인문사에서 발행한 친일문학의 산실 『국민문학』 창간호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문인 가운데 상당수는 낯설다. 까닭이야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크게 보면 이들이 대중에게 알려진 문학 작품이 거의 없는 문인이거나 비평 중심의 문학 활동을 한 평론가(비평가)들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에 활발한 평론 활동을 벌인 최재서(1908~1964)는 백철(1908~1985)과 곽종원(1915~2001), 조연현(1920~1981) 등과 마찬가지로 비평 활동에 주력한 덕분에 일반 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인이다. 덕분에 화려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반 독자들의 주목에서 비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해 중고등학교에 다닌 이라면 국어 시간에 이 평론가들이 쓴 글을 적어도 한 편씩은 배웠을 터다. 나 역시 정확하게 어떤 글이라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들이 쓴 한국 문학사를 통해서 우리 근현대문학의 얼개를 들여다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학평론가들의 잊힌 친일부역 문필활동

최재서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아호는 석경우, 필명은 학수리·상수시·석경·석경생 등을 썼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에 유학해 런던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경성제대 강사로 임용되고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였다.


최재서가 1930년대 데이비드 흄, T. S. 엘리엇 등 영국 평론가들의 이론을 주지주의 문학론으로 소개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평론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1년, 첫 논문 「미숙한 문학」을 『신흥(新興)』 제5호에 발표하면서다.  


그는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조선일보> 1936.11.2.∼7.)에서 박태원의 「천변 풍경」(1936)은 리얼리즘의 확대를, 이상의 「날개」(1936)는 리얼리즘의 심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는 우리 문학을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분석한 글로 문단의 주목받았다. 그는 ‘현실성과 현대성의 조화,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조화를 추구한 비평가’(허윤회)로 평가받기도 한다. 

▲ 1938년 6월, 최재서는 첫 평론집 『문학과 지성』(인문사)을 발간했다.

최재서는 1937년 12월 합자회사 인문사를 설립해서 대표로 취임했다. 1938년 6월 첫 평론집 『문학과 지성』(인문사)을 발간했다. 『문학과 지성』은 그가 도입한 외국의 주지주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카프문학이 표방하는 이념주의를 극복하려 하면서 비평의 현대화를 지향한 저서였다.

월간 『인문평론』 창간

그는 인문사에서 『인문평론』을 창간, 1939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다. 창간호 권두언에서 그는 문학자들도 건설사업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합리화했다. ‘국민문학의 선도적 역할’을 하다가 월간 『국민문학』(1941년 11월 창간)에 그 사명을 넘겨준 『인문평론』은 전기 문학을 암흑기의 친일문학으로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다.


창간호에 밝힌 것처럼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친일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중일전쟁(1937)을 옹호하기 위해 쓴 「전쟁문학」(『인문평론』 1940년 6월호)은 그 전환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인간성을 ‘최고 경지에까지 고양’시키는 ‘엄숙한 (전쟁)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변했다.

최후로 전선의 병사들이 총후의 우리를, 그중에서도 더욱이 다음 세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기대를 걸고 있는가. 그들의 전장의 신념이란 결국 조국의 다음 세대가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행복스러워지라 하는 신뢰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 ‘일지사변(중일전쟁) 3주년 기념’ 기획 특집에 발표한 수필을 통해서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전쟁동원 선전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바야흐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비평가 최재서는 황민화 정책의 선봉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일장기의 범람이었다. 특별열차가 물론 정차도 할 리 없는 촌락 소역에도 일장기는 나부끼고 숲속의 농가에도 일장기가 벽에 붙어 있었다. 더욱이 논도랑에서 어린애를 안은 젊은 여인이 질주하는 열차를 향하여 기를 내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리하여 나는 전쟁 속의 한 사람이 되었다.

- 「사변 당초와 나」(『인문평론』 1940년 7월호)
▲ 최재서의 친일 문필 활동이 시작된 월간지 『인문평론』

최재서는 1939년부터 국책협력을 목적으로 발족한 친일 단체에 참여, 주요 임원으로서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 구축에 부역했다. 1939년 2월 임화·이태준 등과 함께 황군 위문 작가단을 발의했고 3월 14일 황군 위문 문단 사절 위문사 후보 선거일에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에는 황군 위문 작가단 장행회에서 경과보고를 했고 10월 조선문인협회가 만들어질 때는 발기인과 기초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만주국 민생부가 주최한 만주 문화 건설 공작 강연회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총후 사상운동을 위한 문예 순회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최재서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1942년 9월엔 상임 간사)됐고 9월에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에 협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친일 어용 잡지 『국민문학』의 발행·편집인

1941년 11월, 일제는 총력전을 명분으로 모든 잡지를 통폐합해 친일 어용 잡지인 『국민문학』을 간행했는데 최재서는 이후 1945년 5월까지 『국민문학』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국민문학』은 조선 문단을 강제 통합, 어용화해 황도 정신에 입각한 국책문학을 수행시킬 기관지였다.  


최재서는 이 잡지 『국민문학』 창간호에서 국민문학을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아문화의 종합을 지반으로 하고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시험한 대표적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인도할 수 있는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후 이 국책문학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창간 당시 『국민문학』은 국어판(일본어)을 연 4회, 언문판(한글)을 연 8회 내도록 정했으나 1942년 5·6월 합병호부터는 ‘반도 황국신민화 최후의 결정’을 위해 한글을 완전히 폐지했다. 이전부터 평론 분야는 거의 일본어로 쓰였고 ‘언문판’도 두세 권뿐인데 거기도 몇몇 창작만이 한글로 쓰였을 뿐이었다.

▲ 최재서가 이끌어간 ‘국민문학’ 작품제1집(인문사)

실제로 『국민문학』은 친일 작가들의 어용 문학지에 불과했다. 민족의 얼과 문화, 그리고 우리 말글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책동을 영합한 반민족적 문학 행위를 대변한 이 잡지를 통해 최재서는 친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부역하고 있었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6월 평론 수필부 회장을 맡았다. 조선문인보국회는 조선문인협회와 국민시가연맹 등 4개 단체가 통합, ‘조선에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한다’는 구호 아래 1천여 명의 문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친일 어용조직이었다.  


최재서는 1943년 5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내선 작가 교환회에 참석하고 8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2차 대동아 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이 대회 참가 소감을 밝힌 「대동아 의식의 자각-제2회 대동아 문학자대회에서 돌아와서」라는 참관기를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했다.  

대동아전쟁 찬양, 징병제는 ‘천황의 시혜’

이 글에서 그는 ‘대동아 전쟁을 하나의 큰 건설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아 10억의 참다운 결속’을 주장했다. 그는 또 ‘조선은 일본의 거울’이 됨으로써 ‘조선 문학은 2천7백만 조선인만의 문학이 아니라’ ‘1억 국민, 아니 대동아 민족 10억을 위한 문학’이 될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는 내선일체의 구현을 위해 자국 문학의 독자적 정체성을 부정하기에 이른 셈이었다.


대동아 전쟁을 ‘건설전’이라고 규정한 최재서는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친일 문필활동에 들어갔다. 1942년 5월 일본 각의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지원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결정(실제 징병제는 이듬해 개정병역법 이후에 시행됐다)하자 최재서는 이를 열렬히 반겼다. 


그는 「징병제 실시의 문화적 의의」(『국민문학』 1942년 5·6월 합병호)에서 “조선에서 징병제가 포고된 근본적인 의의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서 반도 2천 4백만을 고굉(다리와 팔, 온몸)이라고 믿고 하셨다”라며 천황의 시혜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재서는 징병이 식민지배국가 일본과 일왕을 위해 총알받이가 돼야 할 동포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라 ‘천황의 시혜’로 이루어지는 징병의 ‘영광과 감격’에 참여하기를 촉구했다. 그는 징병제 시행으로 ‘반도인은 확실하게 그리고 영구히 조국 관념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반도인의 자질이 급격히 향상되어지리라고 생각’했다.  


또, ‘반도인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확신하면서 내선일체의 견고한 확립을 위해 ‘조선인이 진실로 황국신민이 됨으로써 대동아 공영권에 있어서의 지도적 민족’이 돼줄 것을 당부했다. 

반도인이 일본에 대하여 조국 관념을 가질 유일한 길은 제국 군인이 되어 직접 국토방위의 임무를 맡는 것 이외에는 없다.
만일의 경우에 자기의 피를 흘려, 아니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데서, 비로소 진정한 조국 관념이 생긴다.
징병제 실시가 반도인에게 확실한 조국적 신념의 기반을 부여한 것.

- 「징병제 실시와 지식계급」, 평론집 『전환기의 조선문학』(1943년 4월) 중에서

최재서는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매일신보> 1943.8.4.)에서 “황군의 일원이 되어 세계의 사악을 걷어치워 버리고 도의적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성전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반도 청년으로서 다할 수 없는 영광”이라며 조선에 시행된 징병제를 다음과 같이 환영하고 선동했다.

이때를 당하여 황군의 일원으로서 중심적인 지도세력이 된다는 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반도가 일찍이 갖지 못했던 영광이다. 그중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어 역사의 활(活)무대에 등장하는 청년은 참으로 세기의 선사(選士)라 할 수 있다. 이 감격과 이 영광을 가슴 깊이 새겨 넣고 감히 그 지닌바 사명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를 조선의 부형(父兄)은 커다란 사랑과 동시에 깊은 정성으로써 기원한다.

1943년 8월 1일부터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최재서는 「징병서원행-감격의 8월 1일을 맞이하며」, 『국민문학』 1943년 8월호)에서 감읍해 마지 않았다. 


그는 “하늘처럼 어버이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는 천황폐하 스스로가 ‘부탁한다’고 말씀하신” 징병제이니 “감격이라 할까, 감분(感奮)이라 할까, 아무튼 우리는 신명을 바쳐 이 대어심(大御心: 임금의 마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하는 것”이 ‘우리의 서원’이어야 한다고 흥분했던 것이다. 

▲ 최재서가 가입해 활동한 친일 부역 문화단체들. 이 단체들은 일제의 신체제를 뒷받침했다.

친일문인 가운데 시인이나 작가는 시나 소설, 또는 수필 따위를 통해서 친일부역행위를 한 반면, 평론가들은 친일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 부역에 동참했다. 비평가 최재서는 「문화이론의 재편성」(<매일신보> 1941.1.14.)을 통해 국가 본위의 문화이론 건설을 주창했다. 


그는 또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일본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일본정신을 현양하여 가는 것”을 새로운 비평이라고 규정했다. (「새로운 비평을 위하여」, 『국민문학』 1942년 7월호) 그는 ‘국민 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공고케 만드는 문화’를 국민문화라고 천명하면서 일본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국민문화 건설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전형기의 문화이론」, 『인문평론』 1941년 2월호) 

친일문학론인 ‘국민문학론’ 선도, 모국어 포기까지

최재서는 일찍이 「문학정신의 전환」(『인문평론』 1941년 3월호)에서 일본정신에 바탕을 둔 국민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친일문학론’인 ‘국민문학론’으로의 전환을 촉구한 바 있었다. 그의 친일문학론은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하고 창간된 『국민문학』의 주간을 맡으면서 노골화됐다. 


친일문학의 산실이었던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은 「국민문학의 요건」에서 최재서는 국민문학론이 일본정신을 담은 이론적 틀임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는 국민문학이 “유럽의 전통에 뿌리박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의 문화 종합을 터전으로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을 대표적인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이끌고 나갈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문학』 1942년 5·6월 합병호의 「편집후기」에서 그는 『국민문학』의 일본어 잡지로의 전환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한글 사용이 문화력 창조력에 장애가 된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문인으로서 민족어, 모국어를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조선어는 최근 조선의 문화인들에게는 문화의 유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민의 종자였다. 이 고민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문화적 창조력은 정신의 수인이 될 뿐(이다.)

1942년 5·6월 합병호부터 『국민문학』은 ‘반도 황국신민화 최후의 결정’을 위해 한글을 완전히 폐지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획책한 조선어 사용 금지가 조선 문학의 주체인 자신에 의해 수행된 셈이었는데 이는 문인 최재서의 심각한 자기 부정이면서 동시에 친일 부역 행위의 정점이기도 했다.


같은 해 『국민문학』 1942년 8월호에 게재한 「조선 문학의 현 단계」에서 최재서는 조선 작가가 더는 한글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향후 글쓰기는 국민문학이므로 당연히 ‘국어(일본어)로 쓰이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집필자는 내선인 공동’이 될 것이며 ‘독자는 반도 2천만이 아니라 1억의 전 국민이며 10억의 대동아 제 민족으로 되는 것이 그 이상’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모국어를 버린다 해도 ‘조선 문학은 멸망하기는커녕, 새로운 조건의 출현으로 오히려 크게 그 규모가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조선 문학이 멸망한다는 ‘절망론’은 ‘보수적인 조선 문학관’에서 나온 그릇된 생각이니 ‘창조적 능력을 살려서 신 일본 문화 건설에 기여’하려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국민문학』 1942년 10월호에 발표한 「문학자와 세계관의 문제」는 1942년 5월 일본문학보국회 결성 소식을 접하고 그 소감을 피력한 글이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크게 네 가지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전환기의 조선 문학』으로 국어문예 총독상 수상

첫째,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총력전에서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단지 국내 제 세력의 일원적 총합뿐 아니라 과거의 정치·경제·문화 내지 세계관의 전면적 청산과 새로운 시대의 기둥이 될 역사적 원리의 창조”라는 것이고, 둘째는 “문예는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높은 뜻에서 정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셋째는 대동아 전쟁이 “미·영적 세계관과의 일대 결전”이라는 것이고, 넷째는 “일본 문화의 우수성과 세계성에 대하여 조금 자신을 가져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는 문학자가 진정한 일본적 세계관을 수립해 성스러운 임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국어문예 총독상을 수상한 평론집(일문)

1943년 4월에 최재서는 『전환기의 조선 문학』을 발간했다. 그는 자서에서 “먼저 가버린 아들 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면서 “네가 죽었을 때 나는 막 태어난 『국민문학』을 너의 추억과 함께 키워 가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그 자신이 ‘일본 국가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의 혼의 기록’이라고 했으니 이 책은 황국신민 이시다 고조의 ‘국가 정체성 발견 기록’이라 할 만했다. 


1944년 1월 최재서는 돌연 창씨개명을 단행, 이시다 고조가 된다. 최재서라는 이름으로 황민화에 앞장서던 그가 “나는 작년 말경 생각 끝에 나아갈 길을 깊이 결의해 1944년 1월 1일에 그 첫 순서로 창씨를 했다. 그다음 날 그것을 조선 신궁에 가서 고했다”고 한 까닭은 알 수 없다.  


1944년 2월 이시다 고조는 평론집 『전환기의 조선 문학』으로 제2회 ‘국어문예 총독상’을 수상했다. 총독부에서 ‘반도 문예의 건전한 발전과 반도 문단의 국어화 촉진 목적’의 상장과 부상 1천 원으로 신설한 국어문예 총독상은 최재서에겐 친일부역의 상급이었을 것이다. 


최재서의 친일문학론은 『국민문학』 1944년 4월호에 발표한 “받들어 모시는 문학은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받들어 모시는 문학」에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시다 고조,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 주장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천하무적이라는 황군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이상은 그 근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께까지 최재서는 국민동원총진회의 발기인과 상무이사를 지내면서 연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1942년 2월 16일자 <매일신보>의 싱가폴 함락 기사. 대부분 친일부역자들은 역사를 오판했다.

1944년 9월 민간에서 근로정신을 계몽해 태평양전쟁에 협력한다는 목적으로 부유층 유지들이 결성한 이 단체는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징용과 징병,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노무 동원에 앞장서는 것이었다.


최재서는 1944년 10월 노무 동원 협력과 민중의 전의 앙양을 위해 평양에 파견됐으며 같은 달에 ‘성전 찬양 및 학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동원 대강연회에 참가했다. 12월에는 응징사(징용에 응한 사람) 가족 위안 대회에 참가했다.  


12월에는 만주 예문협회 주최 전국 결전 예문 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 대표로 참가했다. 각종 시국 행사에 ‘결전’이라는 표현이 빈번히 쓰인 것은 이 시기 전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1945년 1월 최재서는 친일 단체 대화동맹의 처우 감사 총궐기 전선대회에서 ‘철하라 내선일체’란 연제로 연설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태평양전쟁 말기엔 각종 시국 행사와 함께 시국에 대응하는 단체의 결성도 이어졌다. 최재서는 6월 8일 연합군의 본토 상륙작전을 예상해 언론·출판 관계자로 조직된 한일통합 친일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 발회식에 발기인으로 참여, 선언문을 낭독했고 상무이사로 선임됐다. 

해방 뒤 반민법으로 구속됐으나 기소유예

7월 7일 조선언론보국회가 주최한 본토결전 부민대회에서 선언결의문을 낭독했고 같은 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대체해서 결성된 전국 조직인 조선 국민의용대 총사령부에 참가했다. 같은 달 18일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연구조사위원을 맡았으며 19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 ‘본토 결전과 국민의용대 대강연회’ 연사로 평안남도에 파견됐다. 8월 3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에 선임됐다.


그리고 12일 후 친일 부역자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겠지만 해방이 됐다. 그는 평론 일선에서 물러나 연세대와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 등 영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1948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최재서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 8월 그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따라 구속됐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유예됐다.  


1961년 동국대에서 「셰익스피어 예술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문학원론』(춘조사, 1957), 『최재서 평론집』(청운출판사, 1957), 『영시개론』(한일문화사, 1963)과 「셰익스피어 예술론』(을유문화사, 1963)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64년 11월 16일,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최재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 문학인 42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당대의 지성이었지만, 그는 일제와 일제 침략전쟁의 본질도, ‘대동아공영권’ 구호에 숨겨진 허구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일제의 ‘욱일승천’을 오판하고 일본의 신체제에 투항해 버린 그가 역사에 민족을 등진 부역자로 남은 이유다. 그나마 팔봉 김기진과 달리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하나 제정되지 못한 것은 그에겐 불운일지라도 뒷사람에겐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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