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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조선시대'의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조회수 2018. 8. 29. 2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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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을 아시나요?
처장님에게도 조국이 하나이듯 저에게도 조국은 하나입니다.

영화 <공작>의 대사다. 영화는 사업가로 위장한 남한 스파이와 북한 주재 대외경제위 처장 간의 호연지기를 보여준다. 남과 북으로 나뉜 이들의 뜨끈한 우정을 보여준 이 영화는 시기가 적절했다. 최근 8월 20~26일엔 지난 4.27 판문점 선언에서 논의된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됐다.

출처: 데일리안 사진공동취재단/뉴스웨이 이수길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마지막 날인 26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된 작별상봉에서 북측 리근숙(84) 가족과 남측 이부동생 황보원식(78) 가족들이 마지막 만남을 아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눈물의 상봉이 스물한 차례, 분단의 역사도 어느새 73년이다. 이제는 분단 이전의 한반도보다 남과 북이라는, 각자의 조국을 가진 사람들이 익숙한 시점.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잊힌 존재들이 있다. 남과 북, 어느 곳이 조국이냐는 말에 ‘둘 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 조선적의 이야기다.

‘조선적’을 아십니까?

광복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 군정은 재일 조선인 가운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편의상 조선적(朝鮮籍: 조선을 고향으로 하는)이라는 임시 국적을 부여했다. 일명 재일 조선인.


당시 조선적을 가진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이 둘로 갈라진 현실에서 남한과 북한 중 어느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이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할 바에야 ‘조선적’으로 남기를 자처했고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적을 유지하고 있다. 70여 년이 흐르면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재일 조선인은 어느새 3대에 이르렀고 그 수도 약 3만여 명에 가깝다. 


축구 선수 정대세 씨와 안영학 씨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한국 국적 아버지와 조선적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대세 씨는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한국 국적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총련계(재일조선인총연합회) 조선인 학교에 다니며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성장했다. 


현재 일본의 J리그 소속인 축구선수 안영학 씨도 자신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사람"이라 말한다. 2006~2009년엔 K리그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북한 대표로 참가한 경력이 있는 그는, 지난 5월 소수자들의 월드컵인 독립축구연맹(CONIFA)에 감독 겸 선수로 참가했다. 팀 이름은 ‘일본의 통일 코리언들’. 한반도를 상징하는 빨간색 호랑이가 그들의 엠블럼이다.

출처: UKJ 제공
재일 조선인 안영학 씨

동포라는 이름의 낯선 자

2014년 6월엔 정대세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됐다. 과거 해외 방송 등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K리그에서 활동하기 전 북한 축구 대표팀 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일본의 J리그로 이적했다. 


또다른 재일 조선인 2세 김철의 씨는 오사카 연극판에서 한국어로 공연을 하는 극단 ‘메이’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입국 거부를 당했다. 김 씨는 이 사연을 자신의 놀이패와 다큐멘터리 영화 <항로-제주 조선 오사카(2014)>에 담았다. 


김 씨와 같은 조선적은 일본에서는 사실상 무국적자로 분류돼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 역시 일부 보수 단체들의 반발로 조선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적이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한국 영사관에서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출처: 제민일보
재일제주인2세 조선적 연극인 김철의씨가 14일 입국했다. 재일한국인 3세 최지세양(16.사진 왼쪽)과 김수진군(16)과 공항에서 활짝 웃고 있다.

2009년 한국 영사관은 이들의 한국 국적 취득을 종용하기로 했다. 이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고 입국 거부처리가 됨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까지 조선적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률은 100%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43.8%로 급락하고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에는 34.6%까지 하락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 영사관의 남한 국적취득강요는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인권위의 결정은 정당했지만, 조선적을 향한 날선 시선이 가감없이 보이는 사건이다. 여행증명서 발급의 명확한 거부 사유로 꼽힌 ‘반국가적 발언 및 국가안보에 위협이 됨’은 조선적을 위협하는 메시지였다.

가깝고도 먼

오사카에 살던 故 양의헌 할머니는 본래 제주에 살던 잠녀였다. 해방 직후 양 할머니가 일본에 나가 있던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두 개의 한국 국적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던 현실 앞에서 양 할머니는 반세기 동안 딸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이 돼서야 재일동포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고향 땅을 밟고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통일이 되면 내 고향 땅을 원 없이 밟고싶다는 할머니의 염원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잊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광복적 경축사에서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자유로운 고국 방문의 전면 허용을 약속했다. 올해 초에는 여행증명서 발급 기준 및 절차를 완화한 개정안을 내놓았고 발급률은 93.1%에 도달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과 함께 이들을 조명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함께 조장돼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이산가족 조선적 재일동포. 그들의 조국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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