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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는 장애가 웃기냐!?"

조회수 2018. 7. 16.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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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의 이상한 장애 활용법
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여성이 나온다고 여성주의 영화가 아닌 것처럼 장애인이 나온다고 장애인 인권에 기여하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수자성을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거나 편견을 고착시킨다면 더욱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천만 관객 영화 <7번방의 선물>이 대표적인 사례다. <7번방의 선물>은 신파를 위해 장애인을 동원하고 변두리 가족의 이야기를 빌려와선 정상가족 판타지를 재생산한다. 이 무해함 덕분에 위화감 없이 ‘가족들이 둘러앉아’ 눈물 흘리며 볼 수 있는 훈훈한 명절 특선 영화로 방영되는 것이겠지.

장애인은 순수하고 웃긴 사람이 아니다

“1961년 1월 18일에 태어났어요. 제왕절개, 엄마 아팠어요. 내 머리 커서”, “예승이, 콩 먹어.” <7번방의 선물>이 낳은 유행어다. 유행했던 이유는 대사가 웃겨서다. 류승룡이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을 희화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언론은 그의 ‘바보연기’를 극찬하기 바빴다.


영화는 장애를 ‘웃긴 행동’으로 보여준다. 우락부락한 수감자 신봉식이 “딸이 나를 닮았다”고 하자 다들 애써 딸의 탄생을 축하해주지만, 용구(류승룡)는 혼자 ‘여자인 딸’이 ‘못생긴 아빠’를 닮았다는 점에 심각해 한다. 또, 심폐소생술 실습할 때 환자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뺨을 두들기라는 교육을 받고 용구가 환자를 악의 없이 세차게 때리는 장면은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용구의 악의 없는 행동들, 즉 순수한 행동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적장애인은 순수한가? 누군가를 범주화하고 특성을 부여하는 걸 타자화라고 부른다. 타자화는 타인을 의지와 권리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 특성과 한계를 지닌 몸으로 규정하게 만든다. 장애인은 순수하고 장애인은 착하다는 편견이 ‘장애우’라는 타자화된 단어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7번방의 선물>은 바로 그 편견을 빌려와서 신파극을 만든다. 장애를 안고 저소득층에 비혼부(非婚父)로 살아가는 중년의 용구가 순수하기만을 바라는 시선은 한없이 안일하다. 용구는 단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실수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맞을 때도 “잘못했다”고만 빌고 딸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위증한다. 영화에서 장애는 그저 거대 권력과 강자에게 폭행당하는 무고한 피해자의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진짜 아빠는 될 수 없는 용구

<7번방의 선물>은 전형적인 가족상을 떠받든다. 어린 딸과 장애인 아버지밖에 없는 가족인데 무슨 소리냐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똘똘하게 아버지의 건강을 챙기고 혼자 세금도 납부하러 갈 줄 아는 씩씩한 초등학생 예승의 이미지가 짠하게 그려지는 건 어머니의 부재를 어린 딸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승의 담임선생님이 모성애를 보이는 것도 이 공백을 부각하는 장치로 보인다. 더군다나 생활력이 떨어지는 아버지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속 깊은 10살짜리 딸의 모습은 극히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전형적인 미디어 속 부녀관계다.


반전은 여기에 있다. 영화는 편견에 전혀 도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승과 용구 부녀를 통해 정상적인 가족애를 숭상하며 지적장애인이 진정 가족 구성의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용구가 예승과 열기구에 오르는 장면은 <7번방의 선물>의 클라이맥스다. 이 장면에서 노을빛을 등지고 어린 예승을 보는 용구는 갑작스럽게 장애를 극복한다. 그리고 “예승아, 오늘을, 그리고 아빠를 잊지 말거라”라고 말하는, 용구의 발음 같지 않은 또박또박한 내레이션 음성이 낮게 깔린다. 진지하게 부성애의 숭고함을 말하려 할 때 그러기엔 너무 가벼운 지적장애인 용구의 목소리는 갑자기 음소거 되는 것이다. 


용구가 수감돼 있을 때 경찰청장이 예승을 집에 초대해 아내와 함께 송편을 빚어 먹고 목마를 태워주며 완벽한 아버지 노릇을 한다. 용구가 사형에 처한 후 그가 예승의 양아버지가 된다는 점에서 용구의 모자란 사랑을 메워주는 것이다. 이로써 용구는 부성애는 있을지언정 경찰청장처럼 진짜 아빠 노릇을 할 수는 없는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과 같은 모자란 존재로 그려진다.

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사람을 사람으로

이 영화가 소수자를 등장시켜 상업영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소수자성을 신파로 포장해서 순수한 장애인의 이미지를 굳혔을 뿐이다. 장애인의 삶을 시혜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점, 이 가엾은 소수자들이 겪는 온갖 부당함으로 눈물을 뽑아내려는 의도는 하나도 새롭지 않고 오히려 전형적이라 불편하다.


영화엔 좋은 소재가 많았다. 수감자들의 연대, 수감자와 교도관의 연대, 지적장애인의 삶. 그러나 그 모든 요소는 신파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사용되고 버려진다. 아빠, 딸, 장애인, 여자라는 역할만 존재하는 서사 없는 영화가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스크린 바깥에 살고 있는 나도 딸이거나 여자이거나 나쁜 비장애인으로만 존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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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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