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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배운 한 소설가의 추악한 진실

조회수 2018. 7. 16. 11: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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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의 비서로 한일합병에 '공'을 세웠다.
국초 이인직이 펴낸 신소설 작품들.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는 1906년에 발표됐다.

이인직(李仁稙, 1862~1916)은 국문학사를 배우는 우리 중고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가다. 그는 최초의 신소설인 <혈(血)의 누(淚)>(1906)를 비롯해 <귀(鬼)의 성(聲)>, <은세계(銀世界)>, <모란봉>을 썼던 개화기 문학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최초의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짝지어 이인직의 <혈의 누>를 외운다. <혈의 누>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어도 정작 그걸 읽어본 아이들은 없다. 아마 그건 그걸 가르치는 교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0년도 전에 쓰인 낯선 문체와 형식의 소설을 오늘 다시 읽을 일은 없는 것이다. 

이인직, 이완용 비서로 강제 병합을 모의했다

첫 신체시를 썼던 최남선,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주요한,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無情)>의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이인직도 친일 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이인직은 을사오적 이완용의 비서로 일본과 한국의 강제병합을 모의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이었다.


국초(菊初) 이인직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조선 말기에 외무아문 참의, 법부 형사국장 등을 지낸 조중응(1860~1919)이 아관파천(1896) 뒤 국사범(國事犯)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중응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 체결에 참여해 ‘정미칠적’, ‘합병조약’을 주도해 ‘경술국적’으로 손가락질받은 인물이다. 정계에 입문하면서 이인직은 이른바 멘토를 잘못 고른 셈인데 그게 그의 성향 때문인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인직은 신문기자·정치가·외교관을 양성하고자 1898년에 개교한 도쿄정치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1900년 2월 관비 유학생으로 정식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 재학 시절 그는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서 배웠는데 뒷날 고마쓰는 조선 통감부 외사부장이 돼 이인직과 재회하게 된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인직은 1904년 2월 일본 육군성 제1군사령부 소속 판임 대우 통역으로 임명돼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전후 공훈심사에서 일본군을 위한 통역업무에 진력한 공적을 인정받아 공로갑(甲)으로 ‘천황’의 은사금 80원을 받았다.  


이인직은 1906년 2월 일진회(一進會)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이 됐고 6월에는 손병희·오세창 등이 일진회에 맞서기 위해 만든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 주필로 일하며 사회성 짙은 소설을 발표했다. 첫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한 때가 이 시기다. 이듬해 9월에 <치악산> 상편을, 11월에는 신극 대본 <은세계>를 펴냈다. 1913년 2월 1913년 6월까지 <모란봉>을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일제의 침략정책과 한일합병을 지지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신소설은 고대소설의 전통적 맥락을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형식으로 묘사·문체·구성·주제의식과 인간형을 제시해 고대소설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 이는 신소설이 고대소설과 근대적 사실주의 소설과의 중간적 형태라고 규정되는 근거다.

일본의 관점에서 조선의 개화를 바라보다

한국 문학사에서, 이인직은 구술체와 묘사체를 섞어 쓰는 문장,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으로 주목할 만한 신소설 작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서구식 문명개화론 사상을 기반으로 해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등에서 비판의 여지가 적지 않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여긴 다른 신소설 작가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가 누구의 관점으로 계몽을 바라본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에 힘쓴 후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 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해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비스마르크) 같은 마음이요."

-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 중에서

이인직은 일관되게 일본의 관점에서 조선과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의 계몽사상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아시아의 일부이면서도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추구하는 자신을 구미(歐美)의 일부로 바라보고자 하는 유체이탈의 의식인 셈이었다.


1907년 7월 만세보가 재정적인 이유로 폐간되자 이인직은 멘토 조중응의 후원으로 친일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사 사장이 됐다. 이후 그는 당대의 실세 이완용(1858~1926)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비서 노릇도 겸하게 된다.  


1909년 11월 전달 하순에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피살된 전(前)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도회가 경성 한자신문사 주최로 열리자 이인직은 대한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참석해 추도문을 낭독했다.  


12월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밀명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이른바 한국병합 문제와 관련된 일본 정계와 여론 동향을 정탐했다. 이때, 이인직은 친일정객 내부의 권력 쟁탈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하는 합방을 반대하기 위해 조중응과 함께 활동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 상주문(上奏文)’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매국에 앞장섰지만 그 상급도 받지 못했다

이완용은 송병준 내각이 들어서면 보복당할 수도 있고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 이완용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는데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비서 이인직에게 교섭에 나서게 했다.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하여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며 자신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1910년 8월 이인직은 고마쓰 미도리를 만나 한일합병을 비밀리에 교섭했다.  


이 교섭을 토대로 데라우치와 이완용은 1910년 8월 22일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1392년 이성계가 세운 봉건 왕조는 518년 만에 그 명운을 다하고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합병 후 이인직은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으로 선임돼 1916년 11월까지 재임하며 고등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경학원은 성균관의 기능을 정지시킨 총독부가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해 총독부의 식민 정책을 홍보하는 기구로 사성은 경학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다.  


경학원 사성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도쿄정치학교에서 배운 신문기자의 소양을 발휘해 1913년 12월 일제의 식민통치를 홍보 지지하는 경학원잡지(雜誌)를 창간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통권 11호를 낸 이 잡지의 편찬 겸 발행인이었다.  


이인직은 경학원잡지를 편찬하는 한편 지방 순회강연을 다니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 홍보하고 전국 유림의 동향을 살피는 등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13년 11월 전라북도 금산군에서 강연했고 1914년 4월 경학원 시찰단 일원으로 박람회에 참석하고자 일본으로 갔다. 8월엔 함경북도, 1915년 11월에는 함경남도 등지를 돌아 강연하면서 덕치(德治) 인 일제의 식민통치를 통해 모든 분야가 발전하는 은택을 입었다고 미화했다. 

매일신보에 실린 이인직의 사망 기사. 1916년 11월


1915년 11월 10일에는 경학원 간부와 강사 18명이 일본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는데 천황의 덕을 칭송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1916년 11월 3일에는 경학원 간부와 강사 19명이 일본 태자를 세우는 예식에 조선인들이 천황의 신민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헌송문을 지어 총독부에 바쳤다.  


이인직은 1916년 11월 25일 54세를 일기로 사망해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매국노 이완용의 하수인 노릇으로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었지만, 그가 누린 매국의 상급(賞給)은 고작 경학원 사성에 불과했다. 그는 작위는 물론이고 은사금 한 푼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감읍해 마지않은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산 세월도 고작 6년에 미치지 못했다.  


그를 친일의 길로 인도한 조중응은 합병 뒤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 엔(20억 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조중응은 이인직 사망 3년 뒤인 1919년에 죽었다. 천년만년을 갈 것 같았던 영화가 짧았던 대신 그는 ‘정미7적’과 ‘경술국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역사에 남겼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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