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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1456년 세조는 40명의 신하를 ‘찢어’ 죽였다

세조의 잔혹함을 만천하의 알린 사육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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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량진 사육신공원의 사육신 묘역. 예전부터 있었던 묘 네기다.

출처김휴림의 여행편지

사육신,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다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단종(1441~1457)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힌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이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거리에 효수됐다.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성원과 허조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목을 효수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됐고 가산도 모두 몰수됐다. 


세조 2년(1456) 7월 4일(음 6.2.) 정창손 등의 반역 모의 고발로 일어난 단종복위운동, 이른바 ‘사육신 사건’은 8차례나 사형이 집행되고 이 가운데 41명이 거열형에 처해진 대규모 처형이었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의 주모자가 사육신이라고 단정할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는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맞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주동자가 육신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1577)에 나오는 ‘육신전(六臣傳)’이다. 육신전에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순서로 6신의 이름이 명백히 밝혀져 있는 것이다.


단종복위운동이 펼쳐진 것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에서부터 비롯했다. 세종의 장자인 문종이 즉위한 것은 1450년, 병약한 그가 이태 후(1452)에 병사하면서 11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세종의 차자인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으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선의 실권을 손아귀에 넣은 게 1453년이다. 수양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 수십 인을 역모를 꾸몄다는 것을 핑계로 제거했다. 이태 후인 1455년, 수양은 단종으로부터 선위(禪位)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세조의 잔인한 왕위 찬탈에 분개한 6신을 비롯한 많은 문무 신하들은 단종 복위를 결의했다. 마침 세조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는 자리에서 성승(성삼문의 부친)과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劒: 2품 이상의 무관이 국왕 경호나 의장 행사 때에 찼던 칼)으로 임명하자 곧 그 자리에서 거사해 세조와 측근 신하들을 제거하고 상왕(단종)을 복위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 해 세조가 연회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하고 또 왕세자도 병으로 연회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박팽년과 성삼문의 주장에 따라 거사를 미루게 됐다. 이때 거사에 참여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대궐로 가서 모반을 고발했다.

이들은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과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이 서로 모의해 상왕(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추진했다고 고발했고 이로써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났다.


붙잡힌 이들에 대한 심문은 의금부에서 이뤄졌다. 실록에는 의금부의 심문 과정에 대해서 특별히 서술하고 있지 않다. ‘육신전’에서 이들의 심문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충절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세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했고 이에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 등이 차례로 국문을 당했으나 모두 늠름한 태도로 공초(供草: 신문한 조사서)에 승복했다. 이들의 처형이 끝난 뒤 종묘에 사건 처리를 고한 것은 사건 발생 40여 일 만인 8월 12일이었다. 

친자식은 교형, 그 외 가족은 노비로

세조는 사육신 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해서, 친자식들은 모조리 교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조손·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과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영구히 먼 지방 잔읍(殘邑: 쇠하여 황폐해진 마을)의 노비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는 친자식이라도 15세 이하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는다는 규정을 무시한 가혹한 처사였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 연좌제로 어머니, 아내, 누이, 딸이 노비로 전락한 여성이 172명, 공신 집에 끌려간 부녀자가 181명이나 됐다. ‘사육신의 난’으로 사육신을 비롯한 70여 명이 처형됐고 거사에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므로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 서책들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있는 사당 '절의사'. 1978년에 불이문, 홍살문 등과 함께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출처한국관광공사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단계 하위지의 유허비. 인근에 그의 의관을 묻은 묘소도 있다.

사육신은 멸문지화를 당해 후손이 없으나 오직 박팽년과 하위지의 친후손이 이어졌다. 하위지의 조카 중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집안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을 바꿔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해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단종복위운동의 당사자인 단종은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고 모후인 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졌다. 단종이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된 뒤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된 것은 1457년 10월이었다. 


단종복위운동이라 하면 우리는 사육신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지만, 이 거사에 참여한 이는 이들 집현전 출신의 문신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무신과 단종의 외척들의 가담했다. 특히, 복위 모의 과정에서 단종의 외조모 등 여자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섯 신하만을 기리게 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남효온이 ‘육신전’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됐고 사대부들도 이들의 신원(伸冤)을 조정에 요구했다. 그 결과 성종(재위 1469~1495) 때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다. 

숙종 때 관작 회복, 서원 지어 위패 안치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했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됐다. 정조 때엔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김문기는 성삼문·박팽년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의 모의에 가담했고 모의가 발각된 후에도 ‘모반을 인정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회유와 고문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김녕 김씨 문중에서 유응부 대신 그를 사육신으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의 가묘가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설치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그 역시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려 했기 때문이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 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불이문(不二門)·홍살문·비각 등을 새로 지어 단장했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돼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됐다.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육신사. 내부의 사당 이름은 숭정사(崇正祀)다.

하빈 묘리에 있는 사당 숭정사 앞에 세워진 육신의 이름이 새겨진 육각의 비석

육신사의 사당 '숭정사' 전경. 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을 모셔 '육신사'라 부르지 않는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낙빈서원. 서원훼철령으로 없어졌다가 1982년 지방유림이 복원했다.

육신사에 바쳐진 박정희와 최규하의 기림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도 사육신을 모신 사당 ‘육신사’가 있다. 순천 박씨 집성촌인 묘골마을은 앞서 박팽년의 혈육으로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박비(朴婢, 뒤에 일산으로 개명)가 살았던 곳이다. 그는 대구로 쫓겨와 관청의 노비로 지낸 박팽년의 며느리가 노비의 딸과 바꿔 살아난 아들이다.


묘골의 박팽년 후손들은 인근 낙빈서원의 하빈사(河濱祠)에 사육신을 모셨으나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없어졌다. 1970년대 박정희가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의 일환으로 여기 육신사를 다시 세웠다. 충무공 모신 현충사와 비슷한 성격인 셈이다.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으로 후대에 세조의 후예인 임금들로부터도 기림을 받은 것은 그들이 선택한 명분과 절의가 시대의 변천과 무관하게 정의로웠기 때문이다. 사육신의 반대편에 변절자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숙주다.  


쉽게 상하는 숙주나물이 그의 이름에서 비롯했다고 할 만큼 그는 배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부인 윤씨가 남편의 변절을 부끄러워하며 목을 맸다는 얘기는 그녀를 의로운 사람으로 매기면서 배신자로서 신숙주의 이미지를 결정짓는다. 그러나 사실 윤씨는 같은 해 1월에 병사했으니 이는 사실이 아니다. 

숭정사 담장 아래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과 박준규 국회의장의 사육신 충절 기림 돌비가 서 있다.

묘골 육신사의 사당 숭정사(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을 모셔 육신사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담장 아래에 육신의 이름이 새겨진 육각의 비석 옆에는 검은 돌비 세 개가 나란하다. 왼쪽부터 박정희, 최규하, 박준규(국회의장)가 사육신의 충절을 기린 짧은 글귀를 새긴 돌이다.


박준규야 순천 박씨 후손이라니 그렇다 할지언정 박정희나 최규하가 사육신 사당 아래 세운 돌비는 씁쓸하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를 지낸 친일파였고 최규하는 전두환 신군부 시기에 과도기 대통령을 지냈지만, 그 역사적 진실을 끝내 함구하고 떠난 무책임한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충절의 상징이라 할 육신의 사당 앞에 일제와 군부독재에 협력한 이들이 바치는 기림은 아이러니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두 전직 대통령은 사육신의 충절에 기대어 자신들의 남루한 이력을 감추고자 하였던가.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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