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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승인한 일본 천황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인천상륙작전>에 등장하는 미국인 장군의 도움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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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작성일자2018.01.10. | 6,804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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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히토는 마땅히 일급전범으로 단죄됐어야 했다.

1989년 전범 일본 ‘천황’ 히로히토 사망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태평양전쟁의 1급 전범이자 1억 2천만 일본인의 ‘천황’ 히로히토(裕仁, 1901~1989)가 병사했다. 향년 88세. 히로히토는 근대 세계사를 전쟁의 시대로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일본 국민으로부터 ‘살아있는 신’(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았던 세계 최장수 국가원수였다.


히로히토는 1901년 다이쇼(大正) ‘천황’ 요시히토(嘉仁)의 아들로 태어나 25살 때 124번째 ‘천황’의 자리에 올라 64년의 쇼와(昭和) 시대를 열었다. 1921년에 아버지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으며 즉위한 뒤 죽을 때까지 재위했다.


히로히토가 즉위한 1920년대에 일본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불황 상태였고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입헌군주제의 유지 또는 강화를 주장했던 통제(統制)파, 전체주의·국가주의·팽창주의를 지향한 황도(皇道)파,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등의 여러 사상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2천만 아시아인 희생된 전쟁 책임자

1930년대 초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비호 아래 히로히토와 그 측근들은 일본 군부의 중국 침략, 동남아시아 침략을 묵인했다.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 인사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의 대외 침략 전쟁을 도왔다. 그 결과, 히로히토의 재위 기간 중 일으킨 전쟁으로 2천여만 명의 아시아인들이 희생됐다.


히로히토는 1931년 만주사변을 묵인하고 관동군의 진저우(錦州) 공중 폭격을 재가했다.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도 묵인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마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재가만 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패전 후 자신을 방어하는 주요 논리가 됐다.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략을 승낙했고 진주만 공격 8시간 뒤에 선전 조서를 발표했다. 히로히토는 전세가 현저히 기운 1944년 9월에도 칙어(勅語)를 통해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을 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皇運)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연전연승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미국과 맞서 인도양에서 중앙 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유지·방어하는 데 일본의 전력은 역부족이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결국 히로히토는 패전과 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 라디오는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포츠담 선언의 요구를 수락’(항복)하는 이른바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詔書:임금의 뜻을 일반에게 알리고자 적은 문서)’를 읽는 ‘옥음(玉音)방송’을 내보냈다.


“생각하건대 금후(今後)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노라.

그대들 신민의 충정(衷情)도 짐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時運)이 향하는 바,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고 참기 어려움을 참음으로써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을 열고자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선언에 이용한 단어들과 언어는 너무 어려운 말이어서 대부분 일본인은 그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했다. 일본어의 문어를 이용한 데다 선언적인 말투여서 그게 항복이라는 걸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신’이 세속의 언어로 항복을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일본으로 진주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는 히로히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려 했고 히로히토는 그런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함으로써 천황제를 사수’(도요시타 나라히코, <히로히토와 맥아더>)하려 했다. 그리고 이 전략적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맥아더와의 '전략적 거래'로 살아남은 천황제

1945년 9월 미국 상원에는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합동 결의안 94호’가 제출됐다. 하지만 맥아더와 측근들은 전쟁 책임을 모두 일본의 강경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가하고 히로히토는 따로 상징적 입헌군주로 둬 그가 일본 국민을 원활하게 통치한다는 ‘블랙리스트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황위 박탈을 면해 천황제를 지켜냈다. 미국은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완성하면서 ‘천황’의 정치적 실권을 빼앗고 일본에 거대한 미군 기지를 둘 수 있게 됐다. 

▲ 맥아더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히로히토의 모습은 전후 실권을 잃은 현실의 상징 같다.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을 도조를 비롯한 군부로 떠넘겨 처벌 위기를 벗어났고 전후의 사회주의 세력이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협할 것으로 보았다. 그는 안전보장의 위기, 즉 천황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미군 주둔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진단하고 미군의 ‘영구적 주둔’을 위해 정치적 개입을 서슴지 않았다.


히로히토는 당시 내각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전쟁으로 희생된 2천만 아시아인의 죽음에 손을 씻었다. (관련 글: 1948년 오늘-도쿄재판, 일본 전범 7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 도쿄전범재판 법정의 도조 히데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8년 11월 12일에 형이 집행됐다.

히로히토는 1978년부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는데 그의 사후 궁내청은 그 이유가 A급 전범 합사(1978) 때문이라는 내용을 일본 역대 왕들의 공식 역사를 담은 실록에 실었다.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는 자신을 살려준 도쿄재판에 대해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히로히토로서는 A급 전범 합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 등 강대국의 요구에 떠밀려 1946년 1월 1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인간 선언을 해야 했다. 전쟁 중에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신의 현신’인 ‘아라히토카미(現人神)’이었던 ‘천황’은 인간 선언으로 천 년 이상 황위를 이어온 ‘만세일계’ 혈통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신(神)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이 선언은 그를 현인신으로 숭배했던 일본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1년 후, 미국의 계획에 따라 새롭게 공포된 일본국 헌법은 ‘천황’을 일본의 상징적 존재로 규정했다. 이제 ‘천황’은 국가의 통치에 관여할 수 없고 다만 내각의 조언과 승인 아래에 제한적으로만 국사를 볼 수가 있게 됐다.

현인신, 인간으로 돌아와 스러지다

상징적 국가 원수로 돌아간 히로히토는 해양생물학을 연구해 <사가미만(相模灣) 후새류도보(後鰓類圖譜)>, <나스(那須)의 식물> 등의 책을 펴내면서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사망 후 일본 정부는 그가 태어난 날인 4월 29일을 ‘쇼와의 날’이라 부르는 공휴일로 지정했다.

히로히토가 사망한 다음 날, 황태자인 장남 아키히토(明仁)가 쉰여섯의 나이로 125대 ‘천황’ 자리를 물려받았다. 마침내 쇼와 시대가 끝나고 새 연호인 ‘헤이세이(平成)’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히로히토의 죽음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쇼와 천황’ 시대는 형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현재 우경화, 재무장으로 치닫는 일본 정국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의 퇴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광복 70년을 넘겼건만 식민지시기 역사 청산의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기만 하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히로히토와 맥아더>(개마고원, 2009)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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