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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덩케르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영화 '덩케르크'보다 더 친절한 역사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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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들고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친 영화는 그나마 현실을 가장 유사하게 재현한다. 위기상황 하 리더십의 실체를 보고 전투 감각을 일깨우는 데에 영화만 한 것도 없다. 지난달까지 <베트맨 대 수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제이슨 본>을 봤다.


이들 대작 영화는 전반적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을 받았지만 나는 세 편 모두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율을 느꼈다. 본편 상영 전에 스크린에 나온 한 트레일러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덩케르크> 예고편이었다. 1분 6초의 트레일러는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소재 자체에서 소위 ‘먹고 들어간다’. 덩케르크는 인류 전쟁사 중 가장 절망적이면서도 기적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덩케르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출처는 영국 총참모부의 비밀전문과 독일군의 작전명령서 원본이다.


덩케르크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사건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한 이래,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하고 연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마지노선이 뚫렸다 


이에 영국은 원정군을 편성했고 프랑스의 마지노 선(Maginot Line)이 뚫리자 부대를 보내 프랑스군 등과 함께 벨기에 국경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구데리안 장군의 독일 기갑군단은 방어부대가 배치되지 않은 아르덴느 지역을 돌파하여 연합군을 북부 해안 쪽으로 몰아넣었다.

마지노선의 측면 요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스케일의 요새 방어선이었다.


동쪽으로 출구를 뚫어라


5월 16일, 영국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은 부대를 벨기에 국경 쪽으로 기동시켜 해안 쪽으로 포위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구데리안 장군의 부대가 길목을 차단한 상태였다. 구데리안 장군의 기갑군단은 말 그대로 돌진하듯 기동했다. 5월 19일에 솜 지역 통과하여 5월 20일에는 아라스-아브빌을 연결하는 선을 점령했다.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의해 절단돼 더 이상 협조 된 작전을 실행하기 어려웠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


철수는 안 돼!


영국원정군은 이 시점에서 본토 철수를 검토했다. 그러나 현지사정을 모르는 영국 의회는 역습을 지시했다. 이에 고트 장군은 2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 여단을 아라스 지역으로 보내는 역습을 계획했다. 하지만 5월 21일 작전개시 당일, 실제 공격 규모는 2개 전차대대와 2개 보병대대로 축소됐다. 이것이 아라스 전투다. 



아라스전투에서의 선전 


독일군은 영국원정군의 역습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정면에 있던 SS사단(일명 Totenkopf, 제3기갑사단)은, 구데리안 장군의 표현에 의하면 패닉에 빠졌다.

배수진을 친 영국원정군은 전사상자가 50%에 달할 때까지 싸웠다. 독일군 전사상자 규모는 영국군의 배가 넘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계속 나빠져 갔다. 


덩케르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지도.


구데리안군단의 진격


구데리안 장군의 기갑부대는 5월 22일, 덩케르크에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항구도시 보울른까지 진격했다. 5월 23일에는 40킬로미터 떨어진 칼레와 그하블린느까지 점령했다. 5월 24일 아침 구데리안 장군은 덩케르크 방면으로의 공격 준비명령을 하달 후, 남부집단군의 승인이 떨어지는 동안 각 사단을 시찰했다. 



말 그대로 배수진 


연합군의 선택은 항복과 섬멸, 둘 중 하나였다. 프랑스군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와해되었고 영국군은 단 며칠 분의 식량과 탄약 외에 가진 것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공격중지 명령


이때 독일군 상부로부터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5월 24일 오전이었다. 이전에도 정지 명령이 하달된 적은 있었다. 이를테면 5월 17일, 기갑과 보병의 부대 간격 조정을 위한 명령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작전목적조차 하달되지 않았다. 


다만 덩케르크는 이후 공군이 담당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후대 연구자들이 추론한 공격 중지 명령의 사유는 무엇이었을까?


1. 쫄았나?

첫째는 연합군의 아라스 반격으로 인한 심리적 기습이다. 라이오넬 엘리스나 리델 하트 같은 전쟁사학자는 5월 21일의 아라스 전투가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룬드슈테드 장군은 수기에 이렇게 썼다. “잠시였지만, 독일군 보병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기갑 사단들이 (연합군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할까 봐 크게 걱정했다.” 


2. 돌았나?


둘째는 히틀러의 정신적 불안감과 극도의 예민성이다. 이는 독일군 총참모장인 프란츠 할더의 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5월 17일, 프란츠 할더는 “윗분은 끔찍할 정도로 예민하다.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참모부가 새로운 결정을 할 때마다 제동을 건다”고 적었다. 5월 18일에는 “히틀러가 심리적 부담을 못 참아 화를 내고 소리를 쳤다”고도 했다.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불안한 정신상태에 불을 붙인 것이 룬드슈테드 장군이었다고 말한다. 5월 24일 아침 일찍 히틀러는 현장 상황을 보고받기 위해 룬드슈테드 장군의 지휘소를 방문했다.


룬드슈테드 장군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점검, 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기갑부대의 전투력 저하, 깊게 형성된 돌파구 상에서 북쪽(영국원정군)과 남쪽(프랑스군)으로부터 동시에 협격을 당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공격 중지 명령이 하달된 것은 이러한 보고를 받은 히틀러가 자신의 사령부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기 전,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추정).


3. 겁났나?


셋째는 공격 중지 명령이 작전적 판단에 의해 내려졌다는 것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플랑드르의 늪으로 된 저지대에 발이 묶여 전쟁이 장기 소모전으로 갈 것을 우려했다. 구데리안 장군도 회고록에서 공격 중지 명령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미 육군군사연구소는 독일군이 전략적 예비를 보유하기 위해 기갑부대가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충분한 예비의 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훈이었다. 


4. 미쳤나?


넷째는 공군 총책임자 괴링의 무리수이다. 독일 육군 장군들은 괴링이 공군(Luftwaffe)을 앞세워 공적을 세우려고 덩케르크 진격을 막았다고 보았다. 


괴링 장군은 공군 폭격만으로 연합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구데리안을 비롯한 육군 지휘관들은 도심의 건물들과 잘 구축된 진지로 인해 공군의 폭격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선전선동과 모략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괴링 장군의 1935년 사진.


5. 몰랐나?


다섯 번째는 히틀러의 정치적 오판이다. 연합군을 격멸하지 않고 탈출할 기회를 주면, 후일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을 때 호의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으로 오판했다는 것이다. 오인(misperception)을 국제정치적 사건의 변수로 놓고 해석하는 국제정치학의 관점 중 하나다. 


당대에 작성된 1차 사료(史料)의 행간을 잘 읽어 보면 히틀러는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도, 독일군이 유럽을 일거에 휩쓸게 될 줄도 몰랐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놀람, 불안, 분노, 의심 등으로 가득 차 정상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덩케르크 철수 당시 촬영된 사진. 작은 어선, 조각배를 탄 장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이나모 작전


연합군은 영국 의회의 승인에 의해 5월 26일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940년 5월 26일 개시되어 6월 4일까지 실시된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다. 



이미 배는 떠나고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구데리안 장군은 무리해서라도 공격하려고 부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재차 공격 중지 명령이 하달됐다. 구데리안 장군은 일기에 “영국으로부터 온 크고 작은 배들이 부대를 싣고 떠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휴우, 살았다 


연합군은 5월 26, 27일 양일간 2만 8천여 명을 철수시킨 이래, 6월 4일까지 모두 도합 33만 8천여 명을 영국 본토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독일군은 5월 28일부터 본격적으로 덩케르크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구데리안 장군이 일기에 쓴 것처럼 ‘이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덩케르크 철수를 전후로 한 프랑스 전역 전투상황도.

* 이 글은 외부 필진 남정우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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