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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에서 화가로' ─ 19세기 여성화가 3인방

조회수 2021. 2. 27. 09: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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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교양을 위해 그림을 공부할 수는 있었지만, 직업으로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모사는 예술가로서의 기량을 획득하기 위한 기본적인 과정이기도 했지만, 당시에 여성들은 인체 모델을 직접 보고 그릴 수도 없었던 터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모사하는 작업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주변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여성들을 낮추어보았다. 모사하는 여성이 보이면 말을 걸어서 미술관이 문을 닫을 즈음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하라는 글도 있었다.

인상주의 그룹에서 전시한 모리조와 커셋 같은 여성 화가들은 본의 아니게 최전선에 서 있었던 셈이다.

─ 이연식, 클래식클라우드 『드가』 중

미술 작품 속 여성은 '뮤즈'라 불리며
영감의 대상이자 인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대상으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19세기 새로운 미술의 탄생과 함께
미술의 주체로 여성화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국인 / 여성이라는 편견을 이겨낸 화가
메리 커셋
출처: 에드가르 드가 〈루브르에서 커셋〉, 개인 소장

루브르 박물관을 거닐며 그림 감상에 빠진 여성. 메리 커셋이다. 커셋은 미국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유럽을 여행하면서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등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당시 여성은 직업 화가로서 대우받지 못했지만 커셋은 여성 화가를 경시하는 사회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미술 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은 커셋을 만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고 그는 1865년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비록 여성의 입학이 허가 되지 않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교육받을 수 없었지만 개인 교습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습작하며 그림실력을 키워 나갔다.

출처: 에드가르 드가 〈카드를 쥐고 있는 커셋의 초상〉, 스미소니언국립초상화박물관

전쟁으로 미국에 돌아간 커셋은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다시 파리로 돌아와 드가를 만난다. 드가를 만나기 전부터 그의 그림을 봐왔던 커셋에게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 전시에 작품을 출품할 것을 제안했다. 커셋은 드가와 함께 예술적 교류를 나누었다. 둘은 견고한 구도, 차분한 분위기, 위트와 통찰을 담은 예술을 추구했다.

출처: 메리 커셋 〈아이의 목욕〉, 시카고현대미술관

하지만 커셋은 드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켜나갔다. 직업 여성을 주제로 삼은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드가의 그림과는 달리 커셋은 여성의 일상, 특히 엄마와 아이를 주제로 온화한 분위기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또한 미국 상류층과의 친목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미국에 적극 소개했다. 특히 ‘설탕왕’이라 불린 헤브마이어의 부인이자 커셋의 오랜 친구 루이진 헤브마이어가 인상주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이들의 소장품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마네의 제자에서 인상주의 최초의 여성화가로
베르트 모리조
출처: 에두아르 마네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오르세미술관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주의의 시작을 함께한 여성 화가다. 부르주아 출신인 베르트 모리조는 상류사회 여성으로서 교양을 갖추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함께 그림을 시작한 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그림에서 손을 뗐지만 베르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개인교습을 이어가던 중 새로운 스승, 마네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출처: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오르세미술관

마네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르누아르, 드가 등 새로운 예술을 하는 인상주의 그룹과 교류한다. 1874년 인상주의의 첫 번째 전시에 모리조 역시 작품을 출품하려고 했으나 부모와 스승인 마네의 만류로 출품이 무산될 뻔했다. 모리조는 이미 파리 살롱전에서 여러 차례 당선이 될 만큼 인정 받는 화가였으나 직업예술가로서 여성이 활동하기에 제약이 있었던 시대 분위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러나 드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의 부모를 설득한 끝에 첫 번째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모리조는 역시 여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한 그림도 다수 남겼다. 언니 에드마와 조카를 그린 대표작 요람은 색채 대비가 돋보이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보여주며 모리조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출처: 베르트 모리조 〈요람〉, 오르세미술관

모리조는 당시로서 늦은 나이에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했다. 결혼과 출산 이후에는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한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와이트 섬에서의 마네>, <부지발에서 딸과 함께 있는 외젠 마네> 등 대부분 남편인 마네가 딸 줄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렸다. 남성이 여성을 모델로 작품을 그리던 당대 시대상과는 달리 여성 화가가 남성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베르트 모리조의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출처: 베르트 모리조 〈와이트 섬에서의 마네〉, 마르모탕미술관
있는 그대로의 여성을 그린 화가
쉬잔 발라동

커셋, 모리조와 같이 부르주아 여성만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곡예사 출신의 화가 쉬잔 발라동이 있다. 어머니와 단둘이었던 발라동은 식당 종업원, 공장 근로자 등 어렸을 때부터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서커스단에서 곡예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추락사고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한 화가를 소개받아 그의 모델이 된다. 

출처: 르누아르 〈부지발에서의 춤〉, 보스턴미술관

발라동은 곧 몽마르트 화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졌고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레크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활약을 한다. 발라동은 그림 속의 피사체로만 머물지 않고 자신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을 무시하는 화가도 있었지만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소개로 발라동은 드가의 문하생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출처: 쉬잔 발라동 〈푸른 방〉, 퐁피두현대미술관

발라동의 그림 주제 역시 여성이었지만 커셋, 모리조와는 확연히 다른 그림 분위기를 보여준다. 발라동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누드를 즐겨 그렸다. 전통 회화에서도 여성의 누드가 많은 소재로 등장했으나 발라동은 그 이전의 회화들과는 다르게 여성이 스스로 그렸다는 점과 이상적인 미인이 아닌 있는 그대로 늙은 자신의 모습까지 그림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앞선 시대와 차별점을 가진다.

출처: 쉬잔 발라동 〈자화상〉, 몽마르트박물관

발라동은 르누아르, 로트레크, 에릭 사티 등 많은 예술가들과의 염문설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남다른 예술성으로 1911년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평단에서도 크게 인정받았다. 이제는 몽마르트 화가들의 모델이 아닌 몽마르트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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