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누군지 알아?

조회수 2020. 9. 25. 10: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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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는 실체의 모습이 아니라 대상의 특징을 표현한 회화예요. 사물이 아닌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서정적 추상화의 선구자가 있어요. 음악을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위대한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소개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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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VIII’, 캔버스에 유화, 140×201cm, 1923,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는 대상이나 형태를 사실적으로 재현 또는 모방한 그림이죠. 그러나 추상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생하는 전통 회화의 정신을 전복시켜 형태의 구체적인 모습을 완전히 배제한 그림이에요. 점, 선, 면, 색채 등 순수 조형 요소로만 이뤄진 게 추상화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추상화를 보고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추상화는 어렵다는 말을 하게 돼요.


그런데 사실 추상화 속에는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전통 회화가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라면, 추상화는 대상의 특징,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특징만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압축적으로 묘사한 것이죠. 


말하자면 추상화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다 덜어내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특징만 순수 조형 요소로 포착한 날 것 그대로의 미술 사조예요. 한 폭의 추상화가 완성된 과정을 추적해보면 마치 복잡한 수학 공식을 인수분해한 것과 같아요.


추상화는 현대미술이 도래한 20세기에 탄생한 회화 기법인데, 뜨거운 추상으로도 불리는 서정적 추상과 차가운 추상으로 명명되는 기하학적 추상, 두 가지로 대별돼요. 


서정적 추상은 화가의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감정과 열정을 비구상적인 형태와 색채로 드러낸 그림이에요. 반면 기하학적 추상은 수학적인 논리에 따라 선과 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해서 최소 단위의 형태와 색채로 그려낸 그림으로 네덜란드가 낳은 세계적 거장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이 대표적이에요.

서정적 추상화의 선구자

그렇다면 서정적 추상화의 선구자는 누구일까요? 몬드리안과 동시대 인물인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가 그 주인공이에요. 몬드리안보다 여섯 살 위인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태생이지만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뛰어든 서른 살 때부터 독일에서 활동한 가운데 1933년 나치의 폭압을 피해 파리로 거주를 옮긴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그가 1910년에 그린 ‘무제’는 최초의 순수 추상회화로 평가되는데, 이 때문에 20세기 세계 미술계를 뒤흔든 추상화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어요. 특히 칸딘스키는 구상화로 출발해 점진적으로 현대 추상회화의 세계로 나아가 추상 미술사조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지대해요.


점, 선, 면, 그리고 색채와 같은 알몸 그대로의 조형 요소만으로도 무한한 감동과 울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점은 칸딘스키 최대의 미술사적 업적이에요. 칸딘스키에게 미술은 형태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이었죠.


칸딘스키는 음악을 그림으로 환원시킨 화가로 불리는데요. 그의 그림을 보면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음악적 율동과 리듬감이 느껴져요. 실제로 칸딘스키는 음악을 좋아했다고 해요. 클래식,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한 그는 음악과 미술은 하나라고 생각했죠. 음악의 박자, 가락, 화성을 미술적 조형 요소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줄기차게 점, 선, 면, 색채만으로 예술적 실험을 거듭했어요.


1910년 이래 형태의 사실적 재현과 강도 높은 거리두기를 계속해온 그는 1923년 미술사에 길이 남을 역작 한 점을 완성했어요. ‘구성 Ⅷ’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30년에 걸쳐 총 10점을 제작한 ‘구성’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에요. ‘구성 Ⅷ’은 다음과 같은 칸딘스키의 평소 소신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모든 음악의 원천 재료는 악보다. 악보는 기호와 문자, 숫자로 구성된 음표의 조합인데, 나에게 미술의 원천 재료는 순수한 시각적 조형 요소, 즉 점, 선, 면, 색채로 이뤄진 추상화다. 점, 선, 면, 색채는 악보의 음표와 같은 것이다.’


칸딘스키가 20세기 미술의 혁명을 이룬 순수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등재된 데에는 세 가지 체험이 씨앗 역할을 했는데요. 하나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 때 본 모네의 ‘건초 더미’란 작품이에요. 당시 칸딘스키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태와 색채의 변화에 충격을 받고 순수 추상미술로 탐구 여행을 꿈꾸게 됐어요. 


또 다른 하나는 같은 해에 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에요. 칸딘스키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내내 악기들의 선율과 음색이 다양한 종류의 선과 색채로 떠올랐다고 회상했어요. 음악의 미술화를 시도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죠. 


마지막 하나는 1908년 외출에서 돌아와 작업실 문을 열고 본 뒤집어진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에요. 그는 일기에 “작업실로 들어선 순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신비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그림이 있었다. 주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이 감동의 물결이 넘실댔다. 알고 보니 거꾸로 뒤집힌 내 그림이었다.” 대상의 사실적 묘사와 절교를 선언한 지 오래된 칸딘스키의 예술적 신념은 이 지점에서 흔들릴 수 없는 아성으로 뿌리내렸어요. 

그림이 곧 음악이며 음악이 곧 미술

모스크바대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모교의 교수를 역임하는 등 논리정연한 사고력의 소유자답게 칸딘스키는 미술이론 분야에서도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어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1912), <점, 선, 면>(1926) 두 권의 미술이론서가 대표적인데요. 전자는 색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해 미술에서 차지하는 정신성의 중요성을 다룬 책이며, 독일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 쓴 후자는 추상미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저서로 미술이론 정립에 획기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구성 VIII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대거 수집한 것을 토대로 미술관을 설립한 세계 굴지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장돼 있어요. ‘구성’ 시리즈 중 칸딘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형이라고 극찬한 원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에요.


칸딘스키는 원에 대해 “가장 안정적이고 조화로우면서도 어떤 모양으로든 변할 수 있어 동시에 가장 불안하며, 변화무쌍한 무한한 잠재성을 지녀 가장 확실하게 사차원의 세계를 나타낼 수 있는 기하학적 형태”라고 말했죠. 이 그림을 보면 수많은 원과 반원, 삼각형과 사각형은 물론 직선과 곡선 등 다양한 기학학적 요소가 정교하게 배열된 가운데 자유롭게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어요.


크고 작은 여러 색깔의 원은 타악기를 칠 때 생성되는 파장을, 위로 솟구친 수직선은 빠르고 날카로운 가락을, 짧은 사선은 경쾌하고 발랄한 멜로디를, 곡선은 부드럽고 느린 장단을 연상케 해요.  


또한 원과 원을 둘러싼 색과 삼각형, 사각형을 치장하고 있는 색은 음색을, 갖가지 도형을 수놓은 색의 농담은 다양한 악기 소리에서 연출되는 음의 높낮이와 크기를 상징하죠. 가운데 압도적인 크기의 산 모양 삼각형의 두 변을 형성하는 기다란 쌍둥이 수직선은 격렬한 속도의 리듬을 느끼게 해요. 


이것은 음악을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창조력의 결실이며, 칸딘스키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조형미의 기적이라 부를 만해요. 그래서 칸딘스키의 그림은 곧 음악이며 음악은 칸딘스키에게 미술인 것이죠. 보는 이의 마음속에 교향곡의 선율을 아로새긴 순수 추상회화의 정수(精髓)가 아닐 수 없어요. 그림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음악적 감동이 절로 느껴지는 빼어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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