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다' VS '초상화다' 의견 갈린 화제의 미술작품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기법으로 그린 정물초상화가 있어요. 가까이에서 보면 과일, 꽃, 나무를 그린 정물화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인물초상화인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사계절’ 이라는 작품인데요. 이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물화인지, 초상화인지 의견이 분분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청년에서 노인까지 인생을 표현한 창의적인 미술 작품을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가 소개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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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예술의 최전선에 있는 화가들치고 진보적인 독창성을 추구하지 않은 이가 있으련만, 아르침볼도야말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기법으로 시대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이에요. 그는 독특하면서도 기존의 틀을 깨는 과감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과일과 꽃, 식물과 사물 등으로 얼굴 모습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니, 가히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화풍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그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온통 과일과 나뭇가지, 꽃잎투성이의 정물화처럼 보이는데,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의 얼굴 형상으로 깜짝 변신을 하니, 그 기발한 착상에 입을 다물 수 없어요. ‘정물 초상화’라고 해야 할까. 4세기 후의 인물이자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조차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니, 그의 작품이 내뿜는 창의성과 역발상적 사고는 짐작이 가고도 남아요.
실제로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초현실주의 화가들 덕분에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수백년을 훌쩍 넘어 현대인들에게 재평가되는 계기가 됐어요.
152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아르침볼도는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데다 인문학적 소양까지 풍부해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는 등 성공적인 삶을 누린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아르침볼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계절’(1573년)은 루돌프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1527~1576)를 모델로 한 그림인데, 막시밀리안 2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1503~1564) 때 이미 궁정화가로 임명됐다니, 화가로서 인복을 타고났다고 할 만해요.
정물화이면서 초상화에 담긴 해학과 풍자
‘사계절’ 작품은 연작으로 1563년 처음 선보였어요. 1563년산 ‘사계절’은 아르침볼도가 궁정화가로 임명된 지 1년 후에 제작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출세작이에요. 존엄하기 그지없는 황제의 얼굴을 과일과 채소, 식물 등 정물화의 소재에 비유했기 때문이에요. 바싹 다가가서 보면 모습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해 황제를 보필하던 신하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림을 본 막시밀리안 2세는 자신을 계절의 지배자로서 풍성한 수확을 상징하는 성군으로 묘사한 아르침볼도의 기막힌 상상력을 간파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어요. 평소 예술과 동물, 식물, 과학에 조예가 깊었던 황제의 남다른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위대한 화가의 발굴로 결실을 맺은 거예요.
3년 뒤인 1566년 아르침볼도는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시사하는 이미지로 황제의 용안을 그려낸 작품 ‘4원소’로 또 한 번 막시밀리안 2세를 파안대소하게 했어요. 아르침볼도는 ‘4원소’ 그림을 통해 황제를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절대 권력으로 신격화했기 때문이에요.
황제가 얼마나 아르침볼도를 총애했는지는, 신하들과 함께 직접 사계절 그림 속의 복장을 하고 궁정 행사에 참석한 데서 알 수 있어요. ‘사계절’이나 ‘4원소’ 모두 착시현상에 기초한 이른바 눈속임 기법 또는 정물화이면서 초상화인 이중(二重) 그림인데, 그 속에 번뜩이는 기지와 우의, 해학, 풍자적인 뜻이 담겨 있어요.
아르침볼도가 화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데 원동력이 된 ‘사계절’은 1573년 한층 진화된 모습으로 성장해요. 바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 중인 작품 ‘사계절’이에요. 루브르박물관 드농(Denon)관 1층에 전시 중인 이 작품은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그린 그림인데, 계절마다 그 계절을 상징하는 과일과 채소, 식물 등으로 얼굴 부위를 드러낸 정물 초상화, 즉 이중 그림이에요. 전시 공간에는 겨울 작품부터 전시되어 있는데, 로마시대 당시 한 해의 시작을 겨울로 삼았다는 구전(口傳)을 근거로 했다는 해석이에요.
계절의 순환처럼 삶도 돌고 도는 것
4장으로 이뤄진 작품 중 봄, 오른쪽 위의 그림이에요.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의 여왕답게 머리부터 얼굴과 목, 옷차림까지 온통 봄을 상징하는 다양한 꽃과 풀잎이 그득해요. 불그스레하게 홍조를 띤 얼굴이 앳된 소년처럼 보이는데, 성 구별이 확실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어요.
왼쪽 아래에 있는 그림이 여름. 제철 과일과 채소가 눈에 성큼 들어오는데, 활짝 웃는 모습이 열정의 피가 끓어오르는 청년을 생각나게 해요. 뺨은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코와 눈은 오이와 벚나무 열매인 버찌로, 눈썹은 밀 이삭으로 치장했어요. 귀는 마늘, 입과 이빨은 강낭콩, 머리카락은 포도와 호박, 옥수수로 표현했어요.
가슴에서 쑥쑥 커가는 듯이 보이는 식물은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아티초크예요. 참, 오른쪽 어깨 부분에 1573이라는 숫자가 보이는데, 제작 연도예요. 목 부위에는 화가의 이름도 적혀 있어요.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그림이에요.
수확의 계절 가을, 오른쪽 아래 그림이에요. 탐스럽게 영근 포도송이와 낙엽으로 풍성한 머리카락 위에 호박을 모자(혹은 왕관)처럼 쓰고 있어요. 잘 익은 사과가 왼쪽 뺨에 자리하고, 코는 배로, 턱은 석류로, 입은 막 껍질을 깨고 나오는 밤송이로 꾸며 한껏 멋을 냈어요.
가슴 부위가 특이한데,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오크통이에요. 한 해 농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풍년의 분위기가 짐작돼요. 삶이 농익은 장년기를 의미해요.
마지막으로 겨울. 왼쪽 위의 그림이에요. 얼굴 모양이 거칠고 험상궂어요. 자세히 보니 고목이에요. 황량한 겨울 이미지와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황혼기를 비유하기에 안성맞춤이에요. 머리카락도 옆, 뒷머리만 보일 뿐 앞, 윗머리는 다 빠진 게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에요. 오랜 인고 끝에 비로소 효험 있는 식품으로서 가치가 완성되는 버섯으로 입을 묘사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말에 노인의 피부에 생기는 거무스름한 점을 일컫는 ‘검버섯’과도 묘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니 겨울 그림이 더욱 짠하게 느껴져요. 물론 아르침볼도가 한글을 알 턱은 없겠지만. 겨울 그림의 또 다른 묘미는 목 부위에서 메마른 고목의 나뭇등걸을 뚫고 열매를 맺은 가지에서 찾을 수 있어요. 살을 에는 강추위도 곧 끝나고, 머지않아 다가올 희망의 계절 봄을 예고하는 것이리라. 결국 계절의 순환처럼 삶도 돌고 도는 것이 아닐까요.
©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