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의 <님과 함께>에도 반영된 건축양식은 '이것'

조회수 2020. 7. 13. 11: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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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자연을 보거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볼 때 사람들은 흔히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곤 하죠. 이 말은 그림이 아름답다는 말일까요? 아님 정말 자연과 건축물이 아름다울 때 하는 말일까요?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것을 그림에 옮겨 담게 되는데요. 그림을 그린 화가의 그림이 이어져서 '픽처레스크' 양식이 탄생했어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에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자세한 내용을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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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표적인 픽처레스크 양식의 정원인 버킹엄셔의 스토우 가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들은 어떤 풍경을 보고 감동받았을 때 이런 말을 하죠.


이 말을 음미해보면 재미있는데요. 화가는 풍경을 보고 감동받아 그것을 그림으로 재현해요. 그렇다면 그 실제적인 풍경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것을 연필이나 물감으로 재현한 것은 모방이므로 원래의 풍경보다 미흡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떠한 경우에도 모방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일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에서는 실제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자연 그대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무질서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말해 우리의 시야는 무작위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대상을 보게 되죠. 그냥 걷다가 바라보는 자연(여기에는 꼭 대자연이 아니더라도 도시나 사람의 모습도 포함된다)은 정리되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화가가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먼저 프레임을 정해요. 4각의 틀 안으로 특정 장면을 포착하고 안정되게 구도를 잡아 질서를 부여하죠. 이 과정에서 덜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을 제외해요. 심지어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화가의 마음대로 빼버릴 수도 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 대상을 왜곡해서 어떤 미학의 기준에 맞게 재조정할 수 있어요. 그리하여 그림은 실제 대상보다 훨씬 아름답게 승화하죠.


결국 그런 이미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나 인공의 도시, 사람을 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아폴로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프시케의 아버지’, 클로드 로랭, 1663년

고전적이고 이국적이고 극적인 특징

클로드 로랭이라는 17세기 프랑스의 화가는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꿈같은 풍경을 그렸어요. 로랭의 풍경화는 사람들에게 미학적 기준을 제시했어요. 사람들은 실제 풍경을 보고 로랭의 풍경화에 견주어 그것의 아름다움을 판단했던 것이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건축가들은 로랭의 풍경화를 흉내 낸 건축물과 조경을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로랭은 대자연과 고전주의 건축물이 어우러진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요. 건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숲이나 해변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신전 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죠.


건축가들은 이것을 모방해서 나무와 풀이 울창한 숲속에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집’을 지었던 것이에요. 이를 픽처레스크(Picturesque) 양식이라고 부른다.


가수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의 유명한 가사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라는 말은 건축과 그림에 대한 이런 관념과 태도가 반영된 것이에요.


이때 집은 가능한 한 고전적이고 이국적이고 극적인 특징을 가져요. 그냥 평소 도시에서 보던 건축물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이죠. 평소 익숙하게 봐온 집의 형태에서는 감동도, 재미도,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픽처레스크 양식에서는 고대 신전이나 중세의 성과 고딕 성당, 아니면 아예 시골의 오두막을 흉내 내요. 픽처레스크 양식은 교외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자들을 위해 전원 속 낭만적 정원과 건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 양식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특히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는데요. 영국에는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게 되었어요. 산업도시로 발전하는 복잡한 도시, 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공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픽처레스크 양식이 유행한 건 우연이 아니겠죠. 그들은 산업화된 도시를 떠나 한적한 교외에서 한가로운 삶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픽처레스크 건축과 정원은 분명 서양에서 나타난 양식이지만, 한국이라고 그러한 경향과 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건축물을 통해 어떤 이국성과 낭만성을 추구하고, 기능과 무관하게 겉모습으로 그런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무수히 관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이미지를 보면서 이미지 속의 어떤 대상을 동경하고 욕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물론 여기에서 그 대상은 평소 봐오고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아주 머나먼 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죠. 거기에서 사람들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고, 그곳에서 사는 꿈을 꿔요.


마치 미국인들이 유럽의 오래된 성을 동경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듯 한국인들도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서양의 건축물을 동경하고 그것에 자신을 투사해보곤 하죠.

▶이 양옥 주택의 대문은 이것저것을 절충해 어느 나라에도 없는 양식으로 거듭났다.

몰취향에도 아름다움 부여하는 자연

아파트 이름에 ‘맨션’이나 ‘캐슬’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태도가 바로 픽처레스크 양식의 건축물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요. 같은 이유로 웨딩홀과 모텔을 중세의 성을 모방해 짓는 것을 나는 ‘한국식 픽처레스크 양식’이라 부르고 싶은데요.


원래 기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형태가 하나의 양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요. 초가집이나 한옥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한국의 기후와 생활양식에 맞게 만든,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양식이라 할 수 있어요.


근대화 이후 재료와 기술이 발전하자 외국의 양식을 한국에서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그림(또는 사진)에서 본 듯한 아름다움을 구체화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1930년대에 유행한 ‘문화주택’이나 1970년대 짓기 시작한 ‘양옥 주택’이 그것이에요. 그것은 분명 사진 속에서 본 서양의 그림 같은 집을 우리 식으로 번역해 양식화한 것이죠.


예전에는 이 양옥을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욕망이 만들어낸 몰취향의 건물로 미워했어요. 최근에는 이런 건물에서 향수를 느끼고 그런 건물에 들어가면 편안함마저 들죠.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진 양옥도 이제 세월의 때와 함께 멋이 깃들어 보이기까지 해요.


일종의 폐허 취향처럼 오래되어 미적으로 용서를 받은 듯한 느낌이랄까요. 자연이란 몰취향의 건물에조차 기회를 주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부여해요.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은 화가가 의도적으로 질서를 부여한 대상을 자연보다 우위에 둬요.


인공적인 사물은 그 의도적인 질서의 부여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떤 낯섦과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죠. 하지만 자연은 그런 것조차 상쇄해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요. 세월이 흐르면 건축에 무지한 집장사가 지은 건물도 고색창연해지고 구원을 받아요.


그러니 자연을 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생각도 없을 거예요.

ⓒ 김신_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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