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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0주년,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여성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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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이며, 올해는 전쟁이 일어난지 7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호국영웅들 덕분이지요. 


당시 호국영웅들 중에는 여학생의 신분으로 학도병에 참가했던 분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학도병으로 참가한 정기숙씨를 만나 전쟁 당시의 생생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정기숙씨
그때를 돌아보면 그냥 꿈만 같죠. 요즘 젊은이들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하루속히 평화로운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6·25전쟁 당시 17세 학도병으로 참전한 정기숙(87) 씨는 젊은이들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바란다며 이렇게 희망했어요. 6·25전쟁은 정규군뿐 아니라 경찰과 민간인도 대거 참여한 전면전 양상이었어요. 국방의 의무가 없는 여성들 역시 예외 없이 적극적으로 참전했어요. 육·해·공군 등에서 현역으로 참전했고, 군번도 없이 민인 신분으로 참가해 전투 및 비전투 활동을 전개했어요.

▶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가했던 정기순씨가 6월 6일 현충일 오후 한 커피숍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정기숙 씨는 춘천여고 1학년 때 학도의용군에 자원했어요.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가족과 피란을 떠난 그는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돼 고향으로 돌아오자 집은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어요. 다시 학교에 등교한 첫날 군에서 학도병을 뽑자 바로 지원했어요.


춘천여고 1학년 때 학도의용군 자원

정기숙 씨는 “당시 6사단에서 장교 두 명이 와서 정훈부대에서 일할 지원자를 뽑았다” 며 “교련 담당 교사와 함께 학생들을 모아놓고 지원을 받았는데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고 말했어요. 장교들은 교련 교사 등에게 추천받아 노래 잘하고 글 잘 쓰는 학생 네 명을 선발했는데 정 씨가 이에 포함됐어요. “전쟁이 벌어지자 모두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정 씨는 회고했어요.


춘천여고 학생 네 명이 합류한 정훈부대는 화천에서 시작해 함경도 원산 쪽을 지나 압록강까지 전진하는 군부대의 뒤를 따라 버스로 이동했어요. 당시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은 춘천여고에서 지원한 동기생 4명과 춘천방송국 아나운서 2명, 서울 미대생 2명, 사범학교 선배 1명 등이었다고 정기숙 씨는 기억해요. 미대생들은 포스터를 그려서 붙이고 춘천여고 학생들은 노래를 통해 수복 지역 주민들의 안정을 도왔어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지원부대지만 북한군 패잔병들에게 습격을 받는 등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어요.


정훈부대는 1950년 10월 마침내 압록강까지 진출했어요. “압록강 변 초산까지 북진해 압록강이 눈에 보이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만세를 부르고 압록강 물로 손을 씻으며 앞으로 다가온 통일을 축하했다”고 그는 말했어요. 하지만 압록강 변에 도착한 지 이틀도 안 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어요. 중공군이 참전해 벌써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었어요. 정훈부대를 비롯해 압록강까지 진출한 부대들이 적에 포위된 상태였어요 이때부터 밤을 이용해 남쪽으로 행군할 수밖에 없었어요.


중공군 습격으로 낙오됐다 가까스로 살아나

당시 전황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급전됐어요. 중공군의 파병 가능성이 낮다고 본 유엔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자 속절없이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어요. “밤에 행군을 하면 너무 깜깜해 앞사람도 안 보였다. 손을 잡고 가면서 앞에서 적이 있으니 멈추라 하면 멈추고, 그 말을 뒤로 전달하며 그렇게 한없이 걸었다. 어떤 날은 골짜기를 가다 보면 보이지는 않지만 발치에 걸리는 게 있었다. 시체였다. 그런 시체들을 밟고 걷기도 했다”고 그는 당시의 끔찍하고 암울했던 상황을 전했어요.


밤을 이용한 퇴각도 얼마 가지 못해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파탄을 맞았어요. 중공군이 쏘는 따발총에 앞뒤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고 시끄러운 나팔과 꽹과리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어요.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총에 맞겠다 싶어서 산으로 도망가 숨었어요. 한참 뒤 총소리가 멎어 머리를 들어보니 머리 위로 중공군이 지나가고 있었어요. “죽은 척을 했는데 못 본 건지, 보고도 죽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쳤다”며 운이 좋았다고 했다.


오랜 행군에 지쳐 잠들었다가 멀리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깨어났어요. 당장 중공군을 피했지만 적지인 평안북도에 낙오돼 고향으로 갈 길이 막막어요다. 무턱대고 민가로 찾아가보니 한 할머니가 불을 피우고 있었어요. 솔직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할머니가 고구마를 삶아 주었어요. 그 집에서 한참을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 세수하러 산골짜기 개울로 간 정기숙 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들을 만났어요. 같은 학도병이라고 생각해 기쁜 마음에 자신의 사정을 털어놨지만 그들은 북쪽 학도병이었어요.


“그래도 내가 사람을 잘 만났다. 함흥여고 출신이라는 그 사람은 이대로 인민군을 만나면 죽을 수 있으니 자신의 부대명을 알려주고 북쪽 학도병인 것처럼 말하라고 조언했다. 함흥에 있는 자신의 집에 숨었다가 돌아가라고도 했다”고 정 씨는 말했어요. 함흥여고 출신 여성의 신분으로 위장해 인민군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한 정기숙 씨는 부대를 찾아가거나 그곳에 남으라는 말을 듣고 남기로 결정했어요. 그곳에 남아 의무부에서 20여 일을 보낸 그는 이후 서울을 거쳐 제주도로 향한다는 부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어요.


함께 지원한 네 명 중 두 명 끝내 못 돌아와

정기숙 씨는 서울 돈암동 인근에서 할머니 한 분에게 옷을 얻어 갈아입은 뒤 그대로 도망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때가 1951년 2월께로 정 씨가 학도병으로 나선 지 5개월여만이었어요. 함께 정훈부대에 지원한 동기생 네 명 중 두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요. 춘천여고에는 2016년 여학생 학도병 명비가 세워졌어요.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 중 여학도병만을 위한 최초의 명비였어요.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춘천여고 출신 학도병은 모두 아홉 명이예요.

▶ 정기숙씨가 6월 6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0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LG 트윈스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 키움 히어로즈

정기숙 씨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6월 6일 현충일에 프로야구 시구를 통해 여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특별한 행사에 참여했어요. 그는 이날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KBO)리그 키움 히어로즈와 LG 트윈스 경기에 앞서 시타로 나선 이혜민 소위 (국군수도병원 간호장교)를 상대로 공을 던졌어요. 이제 갓 간호장교가 된 이 소위 역시 최근 작은 전투를 치렀어요. 2020년 3월 임관식과 함께 곧바로 '코로나19 격전지'였던 대구로 내려가 국군대구병원에서 의료지원 임무를 수행했어요.


정기숙 씨는 “부담은 됐지만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전쟁터에서 싸우는 후배 군인과 국민을 응원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시구를 했다”고 소감을 밝혔어요. 이혜민 소위는 “역사의 산증인인 선배를 만나서 기쁘다”며 “지금은 총탄으로 싸우지는 않지만 갖고 있는 능력을 다해 선배님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어요.


6·25 당시 여군 2400여 명 참전 ‘군번 없는’ 여학도병도 200여 명

6·25전쟁 당시 수많은 여군이 참전했어요. 육군과 해군 등에서 교육대가 창설돼 여군과 간호장교로 현역 입대했어요. 또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학도의용군, 민간 간호사, 유격대에 편입되거나 수많은 군사 활동에 적극 가담했어요. ‘6·25전쟁 여군참전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여군은 모두 2400여명이 참전했어요. 현역으로 1751명이 활동했고, 군번 없이 참전한 여성은 확인된 인원만 600여 명에 이러요. 육군 여자의용군은 1950년 9월 1일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창설돼 전쟁 기간 동안 총 4기 1058명이 수료했어요. 전방 군단 및 사단과 정훈대대, 첩보부대, 예술대 등에 비치돼 행정 지원과 대민 선무공작, 정훈 교육, 첩보 수집 등의 업무를 수행했어요.


해군 여자해병도 탄생했어요. 당시 제주도 지역에 거주하거나 제주도로 피란 온 여성 중에서 126명이 자원입대했어요. 대부분 미혼 여교사와 여중생들로 구성됐어요. 어려운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했으나 너무 어린 학생과 가사 사정이 여의치 않은 51명은 돌려보내고 75명이 학력 등을 고려해 차등적으로 계급을 부여받았어요.


공군 여자항공병은 이미 1949년 2월 여자항공교육대가 창설돼 1기와 2기에 걸쳐 총 54명이 배출됐어요. 전쟁 당시 42명의 여자 항공병이 복무하고 있었지만 임무 수행을 할 여건이 안 돼 모두 귀가 조처했어요. 이후 26명이 공군본부에 복귀해 참모부서에서 행정 보조업무를 수행했어요.


6·25전쟁 중에는 간호장교 및 간호 군무원들의 활약이 매우 컸어요. 육군과 해군 등에서 모두 664명이 참전했으며, 후방 지원과 민간 간호사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크게 늘어나요. 정규군 외에도 수많은 여학생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군 작전에 기여했어요. 여학생들은 대부분 학교 단위별 또는 개인 자격으로 각 전투부대에 자원입대해 군번·계급도 없이 학생 신분으로 활동했어요. 이들 중에는 유격대에 포함돼 참전한 인원도 있고, 후방 지역에서 보급 활동에 참여하거나 간호사로 참전한 학생도 다수 있었어요. 군번 없이 참여한 여성 중 학도의용군은 2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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