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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40주년, 당신은 얼만큼 제대로 알고 있나요?

조회수 2020. 5. 18. 16: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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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어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근간과 정신을 잇고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데요. 


훗날에도 계승 될 수 있도록 광주시교육청과 5·18기념재단은 전국의 중고생에게 ‘5·18민주화운동’을 알려줄 인정도서를 개발했습니다.


인정도서로 승인을 받으면 공식적인 교과서로 위상이 높아진다는 사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의 의미, 그리고 5·18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지 문답으로 살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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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인정도서’로 본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 인정도서│광주시교육청

5·18민주화운동 40돌을 앞두고 중고생 교육자료로 사용될 인정도서가 발간됐다. 광주시교육청과 5·18기념재단은 5월 12일 “전국의 중고생한테 ‘5·18민주화운동’을 알려줄 인정도서를 개발했다”며 “11년 전 5·18기념재단에서 펴낸 교과용 도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새롭게 구성했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지난 10개월 동안 5·18민주화운동 인정도서를 개발해왔다. 이 도서는 중고생의 눈높이에 맞게 ‘질문’과 ‘만남’을 통해 ‘생각’을 넓혀주는 구성을 갖췄다. 먼저 5·18민주화운동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등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시교육청은 5·18민주화운동 협력학교인 상무고에 5·18민주화운동 과목을 개설해 인정도서 승인 절차를 밟기로 했다. 인정도서로 승인을 받으면 공식적인 교과서로 위상이 높아진다.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늘 고민했다. 시간과 공간, 세대를 넘어 5·18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정도서 주요 내용을 문답으로 살펴봤다.


5·18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나요?

Q.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발생 배경이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왜 광주에서 시작되었을까요?

A.

1980년 봄, 전국으로 민주화 요구가 확대될 때 광주에서도 시민들의 시위가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을 빨리 물러나게 하려는 요구가 아주 거세었습니다. 1980년 5월 7일,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집회를 주관한 전남대 학생회는 신군부가 주도하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면서 시민과 함께 비민주적인 현재의 정치상황을 해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5월 14일에 민족·민주화 성회가 광주의 중심가인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학내에서만 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광주시민 전체와 함께하지않고는 신군부에게 어떤 충격도 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거리 행진을 하고 광장에서 집회를 열며 시민들에게 학생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5월 16일까지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3일간의 민족·민주화 성회는 질서정연하게 이뤄졌습니다. 성회가 끝나면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신군부 세력에 폭력 진압의 빌미를 주지 않고자 집회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자발적으로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성회가 열리는 기간에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워 5월 17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찬반 토론 없이 통과시켰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장악된 정부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지요. 대화와 타협보다는 강경한 진압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으려 했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나요?

Q.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계엄군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어쩔 수 없이 대응 사격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말일까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은 정말 총을 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A.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처음부터 총을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쟁이 시작된 1980년 5월 18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평화적으로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돌과 화염병등을 던지며 계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5월 21일 오후 1시 무렵,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 모여 있던 수많은 시민을 향해 갑자기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광장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은 시내에 있는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 인접 지역인 화순·나주·함평 등지에서 무기를 가져다가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이 가장 원한 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엄군의 총기 사용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결국 시민들도 어쩔 수 없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무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저항권 차원이었습니다. 계엄 당국에 의해 헌법의 기본 권리인 생명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유권 등이 침해되었고, 그 침해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생명을 지킬 합법적인 수단이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무장을 해야 했습니다.


광주사태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이 되었나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한겨레

Q.

5·18민주화운동은 처음에 ‘광주사태’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왜 ‘5·18민주화운동’이라고 하나요?

A.

5·18민주화운동은 열흘간의 항쟁으로 끝이 난 듯 보였지만, 이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면서 오히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광주 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습니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된 청문회는 국민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1992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명예 회복, 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이라는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이 1993년 만들어졌습니다. 이 원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1994년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졌고, 5·18민주화운동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시민·사회단체의 노력도 본격화되었습니다.


마침내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을 통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7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정해 5·18민주화운동을 정부가 주관해 기념하게 됐습니다. 또 2002년에는 1997년 만들어진 망월동 신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해 ‘국립5·18민주묘지’가 되었고,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민주화운동이 많은 시민과 사회·종교 단체의 노력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면서 명예를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5·18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Q.

5·18민주화운동은 오늘날 민주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왜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할까요?

A.

매년 5월이면 전국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광주를 찾습니다. 광주의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사회 각 부문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불타오르자 강력한 탄압으로 잠재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와 같은 각종 인권유린 행위가 드러났고, 이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군사정권의 강압 정치를 더는 참지 못하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자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 항쟁에 참여한 학생, 노동자, 농민, 회사원 등은 시위를 함께 하거나 최소한 암묵적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5·18민주화운동 때처럼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저항을 불러와 자기 정권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죠.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의 요구사항인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여정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이 가져다준 결과이자 영향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성들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Q.

5·18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불의에 저항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남성들만 그려져요. 여성들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A.

1970년대는 아직 남성 중심의 사회여서 여성들의 사회참여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성들도 분명 독재 타도와 민주화의 진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활동 경험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성들이 홍보와 지원 등 여러 활동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5월 22일, 광주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놀란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시내에서 철수를 했습니다. 이때 여러 명의 여성 노동자와 여고생이 항쟁 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으로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시민의 제보를 바탕으로 사망자 명단을 작성하고 시신의 신원을 파악해 방송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5월 23일부터는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도 여성들은 시민의 일원으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5월 27일 도청 진압 이후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 가담자들을 ‘폭도’라고 하며 체포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사람, 길거리 방송을 한 사람 등 40여명의 여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한편 항쟁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어머니들은 항쟁 이후 신군부의 압박에도 앞장서서 5·18유가족회를 만들어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지금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Q.

1980년이면 무려 40년 전이잖아요. 당시 피해를 입은 분이나 유가족은 그동안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 잘 지내고 있나요?

A.

1980년 5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끔찍한 고문 속에 대부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또 다른 피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본인과 가족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가족과 함께 용기를 내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10월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기관으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2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아다니면서 치유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제2의 사고 후유 장애(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은 반드시 해결돼야 할 과제입니다. 또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반인권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Q.

40여 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을 역사로서 배우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A.

평범한 개인은 상황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참여자가 될 수도 있지만, 국가 폭력에 앞장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우리가 비판 의식 없이 국가의 명령에 순응만 하다 보면 얼마든지 또 다른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길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며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18민주화운동처럼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을 살아 있는 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기념 활동에 청소년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4·19혁명이 되었건, 5·18민주화운동 혹은 6월 민주항쟁, 촛불집회 등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확장에 도움이 되는 기념행사가 있으면 ‘구경꾼’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들고 전파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5·18정신, 어떻게 계승할까요?

Q.

5·18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5·18정신’이라고 합니다. 이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요?

A.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한 시민들의 희생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였습니다.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자 일어섰습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5·18민주화운동! 그 정신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의 소중함을 한껏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불복종과 저항은 민주와 인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절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은 저항했고, 그 결과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또 5·18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촛불집회’로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사회 구성원이 서로 나누고 배려하며 함께할 때 가치가 확대됩니다. 1980년 5월 광주의 공동체 정신은 ‘주먹밥’과 ‘헌혈’로 상징됩니다. 광주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고 부상자에게 피를 나눠주며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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