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기린 그림, 명작이 된 이유 알림! (feat. 폴 고갱)

조회수 2020. 2. 28. 16: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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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고흐 헷갈리신다고요? 자신의 귀를 자른 화가가 고흐, 열대의 타히티로 간 화가가 고갱이죠. 함께 살 만큼 절친이었던 둘은 너무 개성이 강해 결국 헤어지고 말아요.


이후 고갱의 일생 또한 아주 드라마틱했죠. 열대의 강렬한 색채로 명작을 남긴 고갱의 이야기를 소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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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과 삶, 죽음 존재의 근원을 묻다

20세기가 열리기 전인 1880~90년대 유럽 미술계에는 세 명의 이단아가 활동하고 있었어요. 폴 세잔과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이 그들이에요. 이들은 당대의 미술 규범과 지배적인 미술이론을 거부하고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창안해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거장이라 칭송받아 마땅해요.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고 기존의 미술적 가치에 충실한 전통적인 미술 질서를 파격적인 방법으로 없앤 이들은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젊은 예술가들의 탐구 정신을 일깨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어요.


세 명 모두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독보적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겠지만 고흐나 고갱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해요. 정신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 못지않게 고갱도 주식 중개인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던 서른 중반 즈음, 홀연히 가정을 저버리고 본격적인 전업 화가의 길을 선택한 데다 남태평양의 외딴섬에서 가난·질병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우다 쓸쓸히 생을 마감해 많은 얘깃거리를 남긴 인물이에요.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세 명의 화가 모두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고갱의 영향력이 고흐나 세잔보다 훨씬 지속적이었다고 평가해요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이종승 옮김, 예경, 1999, 586쪽 참조). 고갱 사후 그가 추구한 원시미술에 대한 후배 화가들의 연구가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시도됐기 때문이지요.


최악의 상황에서 태어난 최고의 대작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난 고갱은 생후 18개월 때 언론인인 아버지가 신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서 추방되는 바람에 외가가 있던 페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7세 때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고갱은 가톨릭계 신학교와 해군 예비학교를 거쳐 3년간의 도선사(導船士) 생활 후 해군 복무를 마친 1871년 파리의 한 증권회사에 들어갔어요. 그의 나이 23세 때였어요. 


2년 뒤, 덴마크 출신인 메테 소피 가드와 결혼한 고갱은 성공한 주식 중개인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으나 입사 11년째인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무너지자 직장을 잃고 취미 삼아 그리던 그림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어요. 그러나 실직에 따른 생활고로 1884년 아내의 고향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족 모두 이주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한 아내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885년 혼자 파리로 돌아와요.


그리고 1890년, 고갱은 처음으로 원시 문명이 살아 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인 타히티를 방문해 3년간 체류한 뒤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갔으나 1895년 6월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어요. 타히티에 정착한 지 2년이 지난 1897년 딸 알린의 사망과 빚 독촉, 건강 악화 등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고갱은 그러나 이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일생일대의 대작을 완성하는 투혼을 발휘해요. 


그 작품이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예요. 1901년 9월 타히티에서 북동쪽으로 1,200km 떨어진 마르키즈제도 히바오아섬으로 거처를 옮겨 작업 활동을 계속한 고갱은 1903년 5월 약물중독과 병마에 시달린 끝에 자신이 짓고 ‘쾌락의 집’이라 명명한 곳에서 55세 나이로 숨을 거뒀어요.


원시적 공간에서 인간과 동물의 순수한 공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눈앞에 둔 1897년, 고갱은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날로 건강이 나빠진 데다 경제적 궁핍과 함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어요. 자살 직전까지 간 고갱은 그러나 7년 전 처음 타히티 땅을 밟았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 초인적인 창작열을 불태우며 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선보여요. 


1897년 12월부터 1898년 1월까지 한 달 남짓 걸려 완성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유화 작품이에요. 현재 보스턴미술관에 소장 중인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생명의 탄생과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3단계로 묘사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실존적인 명제를 고찰한 그림답게 세로 139.1cm, 가로 374.6cm의 어마어마한 크기에요.

▶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캔버스에 유채, 139.1×374.6cm, 1897~1898. 보스턴미술관 소장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의 진행 과정은 그림 속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전개돼요. 화면 맨 오른쪽 아래에 어린아이가 누워 있어요. ‘우리는 어디서 왔고’에 해당하는 생명 탄생이자 과거의 상징이에요. 가운데 과일을 따는 인물은 현실 세계, 곧 ‘우리는 무엇인가’인 현재의 삶을 나타내요. 맨 왼쪽의 노인, 잔뜩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암시하는 미래나 다름없어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별이 모호하게 표현돼 있고, 신체 비례도 어색하며 개와 고양이, 산양, 새 등 많은 생명체가 두루 등장해요. 배경이나 색채, 화면 구성, 인물들이 한결같이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요. 그림의 양쪽 위 모서리 부분을 노란색으로 처리한 것도 원시성을 자극해요. 스케치 없이 상상력을 동원해 주관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에요. 


원근법도 배제됐고, 해부학에 기초한 입체감도 찾아볼 수 없어요. 반문명주의자답게 고갱은 일체의 미술이론 기법을 거부한 것이지요.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공간에서 가장 순수한 모습의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시사회를 동경해온 고갱의 바람이 느껴져요.


고갱은 이 그림을 그린 후 동료 화가인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달 내내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그린 그림일세. 아마 내 그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네”라고 밝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작업에만 몰두했음을 고백했어요.

ⓒ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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