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물감을 발명한 사람이 이 남자였다니!

조회수 2019. 11. 29. 17: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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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5세기 유럽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가 얀 반 에이크(1395?~1441)는 오늘날 널리 쓰이는 유화물감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어요. 유화물감은 색깔이 있는 식물이나 광물을 곱게 빻은 가루에 정제한 기름을 섞어 만든 인공 염료예요. 


덧칠이 가능해 그림을 수정하기 쉽고 정확하고 여유로운 묘사는 물론 광택이 나는 색깔까지 표현할 수 있어 발명 당시 혁명적인 물감으로 인기를 끌었어요. 15세기 북유럽 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이야기,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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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 작품의 시조 도상학의 교과서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패널에 유채, 81.8×5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Web site of National Gallery, London·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유화물감이 나오기 전 중세 시대까지 화가들은 달걀을 용매로 안료 가루와 혼합한 템페라(tempera) 기법을 주로 사용했어요. 그러나 템페라로 제작한 그림은 달걀 성분이 너무 빨리 마르는 바람에 그림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고, 여러 색이 섞여 일으키는 미묘한 농담(濃淡) 효과와 부드러운 색의 변화를 구사할 수 없었어요. 


유화물감의 등장은 당시 화가들에게 비포장도로가 아스팔트 도로로 바뀐 것과 같은 축복으로 여겨졌던 거예요.

에이크가 활약했던 플랑드르 지역은 현재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 중세 국가로 그곳에서 그는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전신 초상화를 완성한 화가로 이름을 날렸어요. 


유화 기법을 앞세운 정교한 사실주의 양식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확립한 에이크는 그래서 15세기 북유럽 미술의 거장으로 불려요.


출생과 성장·미술계 입문 베일에

에이크가 남긴 작품 중 종교화인 ‘헨트 제단화’는 에이크의 형이자 동료 화가였던 후베르트 반 에이크와 공동으로 작업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꼽혀요. 벨기에 북서부 헨트시 성 바보(St. Bavo) 대성당의 장식 제단화인 이 그림은 총 12개의 패널로 이뤄졌는데, 병풍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제작됐어요. 


후베르트 반 에이크가 그리기 시작한 이 제단화는 1432년 동생 얀 반 에이크가 완성했어요. 2년 후인 1434년, 얀 반 에이크는 사실주의 전신 초상화의 진수인 한 점의 작품을 선보여요. 그림 속 각종 형상의 상징적 의미와 우의성, 또는 속성 등을 비교 분석하는 미술사 방법론인 도상학에서 늘 거론되는 그 유명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에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여러 가지 이유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먼저 당시에 볼 수 없었던 부부의 전신 초상화라는 점과 부부의 모피 의상을 비롯해 카펫, 슬리퍼, 강아지, 볼록거울, 창틀과 탁자 위 과일, 샹들리에, 가운데 벽에 보이는 볼록거울 좌우의 묵주와 작은 솔, 커튼 등 그림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이 마치 돋보기로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듯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돼 화가의 압도적 관찰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는 점이에요. 

이 그림은 또 부부의 복식과 자세, 표정은 물론 그림에 나타나는 모든 형상이나 물건이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상징 또는 우의적인 뜻을 암시해 도상학의 교과서로 평가받아요. 


샹들리에 바로 아래 라틴어로 쓰인 ‘나,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라는 서명도 이 작품의 미술사적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 라틴어 서명은 화가인 얀 반 에이크 스스로 부부의 결혼 서약이 이뤄진 현장의 증인임을 선언한 것으로 이는 미술 역사상 최초의 시도로 평가된다는 이유에서예요.


얀 반 에이크는 1441년에 사망한 사실만 확인될 뿐, 정확한 출생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1395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주장이 유력한 가운데 일반적으로는 1390년대 태생으로 표기하고 있어요. 성장 과정과 미술계에 입문하기까지 행적도 베일에 가려졌어요.

벽면 볼록거울이 감상 포인트

1434년에 탄생한 이 그림은 유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돼요. 캔버스는 오크 화판으로 세로 81.8cm, 가로 59.7cm의 크기다.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돼 있어요.


15세기 이탈리아 상인의 결혼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을 천천히,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내가 마치 이 방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두 가지 이유에서예요. 하나는 그림 속의 모든 것이 놀랍도록 치밀하고 섬세하게 눈에 들어와 그림이 아닌 실제 방 안 모습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는 그림을 보는 시선이 볼록거울이 걸린 벽면 뒤로 넘어가도록 소실점을 두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착각이 들게 의도적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는 이유죠.

에이크는 이 그림을 통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집요한 화가로서 관찰력과 인내심, 끈기를 여실히 보여줘요. 그림 왼쪽의 남자는 이탈리아 상인인 신랑 조반니 아르놀피니, 오른쪽 여자는 신부 잔느 드 쉬나니예요.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 대단히 강렬하고 인상적이며 화려하고 값비싸 보여요. 비단과 모피로 만들어진 두 사람의 의상은 옷감의 재질이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극사실적으로 묘사됐어요. 그림의 사이즈가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솜씨가 아닐 수 없어요.


엄숙한 표정을 한 남자는 왼손으로 여자의 오른손을 살포시 잡고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고 있어요. 녹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수줍은 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죠. 혼인 서약의 순간임을 말해주고 있어요. 혼전 임신처럼 보이는 불쑥 나온 여자의 배는 다산에 대한 염원이나 당대 유행했던 옷차림이란 설도 있어요.


그림 맨 왼쪽의 창문 아래 탁자에 놓여 있는 오렌지는 당시 비싼 값에 거래됐던 과일로 부부의 재력을 암시해요. 화려하게 장식된 샹들리에, 붉은색의 침대와 깔끔하게 정돈된 커튼, 여자의 오른쪽 발치에 보이는 동양풍 카펫도 부부가 상당한 재력가임을 드러내는 상징이에요. 


볼록거울 바로 옆의 묵주는 종교의 신성함을 나타내며, 그림 맨 아래 왼쪽에 벗어놓은 샌들은 종교 장소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듯 이곳이 성스러운 곳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경건한 결혼 의식을 뒷받침해요. 


그림 아래 가운데에 서서 뚫어져라 우리를 바라보는 강아지는 충성의 상징으로 성실한 부부관계에 대한 맹세를 의미하죠.

이 그림을 감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가운데 벽면에 걸려 있는 볼록거울이에요. 볼록거울의 특성상 방 안 모습 전부를 비추고 있는 거울 속에는 부부의 뒷모습뿐 아니라 두 명의 남자가 우리의 시선을 끌어요. 두 남자 중 한 명이 혼인을 증명하러 입회한 에이크예요.

ⓒ 문화 칼럼니스트 박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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