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사자를 공격하는 이유

조회수 2019. 11. 15. 21: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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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弱肉强食]. 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는 이 한자성어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을 설명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코끼리와 사자 중에서는 누가 강자이고 약자일까요? 위클리 공감 연재 칼럼에서 살펴보시죠!

위클리 공감 누리집 원문 기사 보러 가기


짐승의 세계에도 약육강식은 없죠

드라마 '태조 왕건'을 기억하시나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KBS에서 무려 200회에 걸쳐 방영된 대하 역사드라마죠. 후삼국 시대부터 태조 왕건까지 고려사를 다뤘어요. 


주인공은 왕건 역할의 최수종이지만 정작 드라마는 김영철이 맡은 궁예를 중심으로 펼쳐져요. 아직도 누리소통망(SNS)에는 김영철이 황금빛 옷을 입고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채 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면이 소위 ‘짤’ 형태로 돌아다닐 정도니까요.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것은 생존의 본능이라고 하였소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이치를 명심하고 힘을 더욱 크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보시오. 천만 년을 갈 것 같던 저 당나라도 바람 앞의 등불이올시다.

우리가 좀 더 힘을 일찍 얻고 이치를 깨달았다면 어찌 당나라를 취하지 못하겠소이까? 꿈을 가지십시다. 미륵의 큰 꿈을 가져보십시다. 그리하여 저 중원 대륙을 우리가 살아서, 우리 땅으로 만들어보십시다.”

_드라마 '태조 왕건' 37화 궁예 대사

37화 때 궁예가 한 말이에요.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것은 생존의 본능’이라는 궁예의 주장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아마 약육강식일 거예요. 


약(弱)한 동물의 고기(肉)를 강(强)한 동물이 먹는다(食)는 말이에요. 그렇죠. 쥐처럼 약한 동물을 올빼미 같은 맹금류가 잡아먹어요. 토끼 같은 초식동물은 늑대 같은 육식동물이 잡아먹고요. 


약한 동물이 강한 동물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여요.

인종차별·나치즘으로 나간 사회진화론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요? 약육강식이라는 사자성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약육강식이라는 말의 저작권은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인 한유(韓愈)에게 있어요. 불교와 도교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유교 중심주의를 강조한 사상가이기도 하죠.

“새들이 머리를 숙여 모이를 쪼다가도 금세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나, 짐승들이 깊숙이 숨어 살다가 어쩌다 한 번씩 나오는 것은 다른 짐승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의 고기가 강한 자의 먹이가 되는 미개한 상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나왔죠. 그런데 잘 보면 그가 말하는 약육강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뉘앙스가 사뭇 달라요. 


약육강식은 짐승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지만 인간 세계에 약육강식이 적용된다면 짐승처럼 미개한 상태라는 것이죠. 그러니 적어도 인간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렇죠. 우리가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되죠. 그런데 한유는 짐승의 세계, 즉 자연의 세계를 사뭇 오해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방영되는 다큐멘터리 가운데 최장수 프로그램은 의심할 바 없이 '동물의 왕국'이에요. 


영국의 BBC가 제작한 동물 다큐멘터리를 기본으로 하고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엮은 시리즈죠.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에 시작해서 아직도 방영하고 있어요.

△탄자니아 북서부 야생 초원 세렝게티의 사자들│ 한겨레


동물의 왕국은 일정한 포맷이 있어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등장하죠. 초식동물은 풀을 뜯어 먹으면서 살을 찌워요. 배가 땡땡하죠. 건기가 아니라면 부족할 것이 없는 세상을 살아요. 


이때 낮잠이나 즐기던 게으른 사자가 해가 어스름해지면 일어나요. 허기를 느끼죠. 그들의 눈에 사바나의 영양 떼가 보여요. 사자는 영양을 잡아 배를 채워요. 사자가 먹고 남긴 찌꺼기는 독수리나 하이에나의 차지가 되죠. 먹이사슬이 쉽게 이해되는 장면이에요.

빤한 줄거리를 우리는 보고 또 봐요.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약육강식’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라고 느끼고 그걸 우리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 해요.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은 약육강식의 인간 사회 버전이에요. 1859년 찰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은 다양한 분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요. 허버트 스펜서는 찰스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해 사회진화론을 만들어요.

사회진화론은 인간 사회의 본연의 모습 역시 투쟁임을 강조해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고 그들의 자산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죠. 


정말 당연할까요? 잘 판단이 되지 않으면 사회진화론의 결과물을 볼 필요가 있어요. 사회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이어지거든요. 


유대인 대량 학살이 대표적인 결과물이죠. 우리나라에도 19세기 말 들어와요.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몇 번의 실패 끝에 좌절을 겪은 다음에는 사회진화론에 따른 열등감을 갖게 되고 결국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이 주로 여기에 빠지죠. 


이쯤 되면 사회진화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대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인 줄 안다는 것이겠죠.

자연의 세계에도 통하지 않는 원리

△태국 치앙마이 네이처파크의 코끼리│ 한겨레


그렇다면 아무리 봐도 사회진화론은 틀렸다고밖에 볼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자연에서는 통하는 약육강식이 인간의 사회에서는 통해선 안 되고 통할 수도 없다는 모순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근본부터 틀렸어요. 짐승의 세계에도 약육강식은 없어요.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에서 최고 강자는 누구인가요? 사자? 아니에요. 코끼리예요. 사방이 바짝 마른 건기에 사자들이 겨우 고인 물을 찾아 마시고 있을 때 코끼리가 나타나면 사자는 자리를 피해요. 


사자가 코끼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경차가 덤프트럭을 들이받는 것과 같아요. 물리적으로 공격 가능한 상대가 아니에요. 기린, 코뿔소, 하마는 또 어떤가요? 이들 거대 초식동물들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심해서 또는 귀찮아서 육식동물을 공격해요.

코끼리, 기린, 코뿔소, 하마가 아프리카 평원의 강자예요.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 약자인 사자와 표범 그리고 치타를 먹지 않아요. 


이들 사이에는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먹는 까닭은 그들이 강자여서가 아니에요. 고기만 먹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초식동물은 풀을 먹을 때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요. 


반면에 육식동물은 다른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그래서 최소한만 먹어요. 배가 등짝에 붙을 때까지 참죠. 그리고 그들도 힘이 빠지면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가 돼요.


짐승의 세계에서도 통하지 않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서 통해서는 안 돼요.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죠. 무릇 인간이라면 이치에 따라야 해요.

ⓒ 이정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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