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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화가가 그토록 기고만장했던 이유

조회수 2019. 11. 14. 15: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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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실주의 화풍으로 명성을 떨친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그의 대표적인 작품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생식기와 체모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죠. 오늘은 귀스타브 쿠르베에 관해 알아볼까요?

위클리 공감 누리집 원문 기사 보러 가기


천재에게 경의를… 딱 보면 ‘아하!’

△귀스타브 쿠르베│ ⓒNadar·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쿠르베가 활동하던 당시 화단은 질서와 조화, 비례, 균형을 중시한 신고전주의(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와 작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신화의 주인공이나 영웅을 과장되게 미화한 낭만주의(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쿠르베는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신념으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묘사를 거부하고 일상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리얼리즘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며 기성 화단의 인습과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했지요.

그림을 통한 정치·사회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쿠르베의 사실주의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요. 


어느 날 그는 천사를 그려달라는 고객의 주문을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고 단칼에 내쳤다는 거예요.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해 적나라하게 묘사한 ‘세상의 기원’과 예술가의 자긍심을 마음껏 발산한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등 대표작을 남긴 쿠르베는 200년 전인 1819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 지역의 동화처럼 아름답고 작은 마을인 오르낭에서 태어났어요. 


고향 마을에서 중등학교와 브장송 왕립고교를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낸 쿠르베는 1840년 법학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으나 루브르박물관에서 마주한 거장들의 명작을 보고 난 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요.

“보이는 대로 그린다”… 정치적 탄압도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년, 캔버스에 유채, 129×149cm,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부유한 지주였던 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사실주의 화풍에 천착한 쿠르베는 시골 마을 남루한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돌 깨는 사람들’(1849)과 농가의 장례식을 다룬 ‘오르낭의 매장’(1849~1850)을 제작하면서 사실주의의 서막을 알렸어요. 


4년 뒤인 1854년, 쿠르베는 화가로서 무한한 자부심과 예술의 위대성을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 대표작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를 탄생시켜요. 


이듬해인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심사위원단에게 거절당하자 전시회장 가까운 곳에 ‘사실주의, 쿠르베전’이라는 타이틀로 보란 듯이 개인전을 여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어요. 


고리타분한 제도권 미술과 기득권 세력들의 편견과 선입견에 당당하게 맞서온 그다운 처신이었어요.

1860년대부터는 자화상을 비롯한 초상화와 풍경화, 정물화, 심지어 여성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에도 관심을 보인 쿠르베는 순수 미술의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정치적 신념이 강했어요. 


실제로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주도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한 이듬해인 1871년 쿠르베는 왕정 부활을 염려해 결성된 파리 코뮌 정부에 가담하는 등 정치 활동에 뛰어들어요. 


그러나 1871년 5월 정부군이 코뮌 정부를 붕괴하면서 체포된 쿠르베는 계속되는 정치적 탄압에 시달린 나머지 1873년 7월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어요.

망명 생활 4년여가 지난 1877년 12월, 쿠르베는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스위스 라투르드펠즈에서 58년간의 생을 마감했어요. 


평생 자신이 보고 직접 경험한 것만 그리며 아름다움보다 진실을 추구한 쿠르베의 사실주의 화풍은 이후 근현대 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미술 사조로 자리매김했어요.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는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쿠르베의 대표작으로 원래 제목은 ‘만남’이에요. 왜 ‘만남’이라고 제목을 붙였는지는 보는 순간 ‘아하!’ 할 정도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죠. 


그림의 내용도 매우 평범해요. 푸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들판, 세 남자와 강아지 한 마리, 그림 오른쪽 가운데에 보이는 마차, 금방이라도 먼지가 날 것 같은 푸석푸석한 시골의 황톳길. 언뜻 이런 그림이 어떻게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아무리 뜯어봐도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작품의 의미는 맨 오른쪽의 남자에게 숨어 있어요.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 해학적 부제

우선 이 남자의 차림새를 볼까요? 남루한 복장에 작업화처럼 생긴 낡은 신발을 신고 있어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도 나무를 깎아 만든 듯 투박한 모양새죠.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나무로 만든 상자예요. 촌스럽게 생긴 상자에는 그림을 그리는 각종 도구인 화구가 들어 있어요. 


반면 강아지 바로 왼쪽에 보이는 인물은 척 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가죽 구두를 신고 있어요. 세련된 신사의 모습이죠. 심지어 맨 왼쪽에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자조차 조끼에다 반코트를 잘 차려입고 있어요. 


그런데 허름한 복장과 달리 오른쪽 남자가 서 있는 자세를 한번 볼까요? 한마디로 거만하고 기고만장해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에 무게중심을 실은 채 허리 위에서부터 머리까지 상체를 뒤로 젖힌 모습이 상당히 건방져 보여요. 중충한 옷차림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뻣뻣한 자세가 아닐 수 없어요.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자신이에요. 쿠르베 왼편의 신사는 쿠르베의 경제적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예요. 


맨 왼쪽의 남자는 브뤼야스의 하인 또는 집사로 보여요. 그림은 파리 남서부 몽펠리에를 방문한 쿠르베가 그 지역의 재력가이자 자신의 후견인인 브뤼야스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에요.

그러면 쿠르베는 깍듯이 예를 다해도 모자랄 후원자 앞에서 왜 이렇게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돈의 힘보다 예술의 힘, 예술가의 힘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랍니다. 


쿠르베는 이 그림을 통해 예술은 이 세상 무엇보다 고귀하며, 그렇기에 화가를 후원하는 후견인도 화가에게 경의를 나타내야 한다는 선언을 한 거예요. 


실제로 불손해 보이기까지 하는 쿠르베의 태도와 달리 후원자는 왼손에 벗은 모자를 쥔 채 예를 갖추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요.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가난한 화가가 경제적 후원자를 상대로 무한한 자부심을 뽐낸 이 작품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 당대의 사람들이 충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쿠르베가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고 해학적인 부제를 붙인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에 소장돼 있어요. 세로 129cm, 가로 149cm 크기로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그려졌어요.

ⓒ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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