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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충격적이라 마네조차 숨겨두었던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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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의 미술 사조는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됐어요. 사물과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가 저물고,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태를 즉각적으로 포착하는 인상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죠. 흥미로운 프랑스 근대 미술의 숨겨진 이야기, 함께 살펴볼까요?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30.5×190cm, 캔버스에 유채, 1863,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인상주의 화풍 선구…낙선작 화단 발칵

1820~1830년대 사진기의 발명으로 그림을 통한 사실 재현 능력이 위기에 봉착한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고개를 내민 인상주의 화풍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화가가 바로 에두아르 마네(1832~1883)예요.


마네는 바탕색을 칠한 뒤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하는 전통적인 회화 양식과 달리 처음에 그린 색을 그대로 살리는 ‘알라 프리마(alla prima)’ 방식을 사용했어요.


알라 프리마는 단 한 번의 마무리, 처음에 그린 것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뜻의 이탈리아 단어에요.


이 방식은 물감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 나중에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마네는 또 색채 구사에서 중간 톤을 없애 작품의 평면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추상미술의 출현에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답니다. (<두첸의 세계 명화 비밀탐사> 모니카 봄 두첸 지음, 김현우 옮김, 2002, 생각의나무, 171~172쪽 참조)


마네는 1832년 프랑스 파리에서 법조인인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와 외교관의 딸인 어머니 외제니 데지레 푸르니에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유복한 가정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란 마네는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해 법대 대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이마저도 낙방하는 바람에 본인이 원한 대로 미술의 길로 뛰어들게 됐어요.

△에두아르 마네│ ⓒNadar·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어린 시절부터 루브르박물관을 드나들며 자연스레 그림의 세계와 익숙해진 마네는 1850년 고전주의 화가인 토마 쿠튀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회화 기법을 익혔어요. 


이 시기에 마네는 유럽 각국의 미술관을 찾아 렘브란트와 루벤스, 고야, 벨라스케스 등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화가로서 내공 단련에 몰두했죠.


1863년, 31세의 마네는 프랑스 화단을 발칵 뒤집었어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미술전인 살롱의 낙선작들을 전시하는 살롱 낙선전에 내건 한 점의 작품이 발단이 됐죠. 


바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요. 울창한 숲속에서 양복 차림의 두 신사와 완전히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있는 내용의 그림이죠. 


이 작품은 신화 속 인물을 이상적인 미로 표현했던 종전의 여성 누드 통념을 깨뜨리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저속하며 원근법을 무시하는 등 화가가 그린 그림인지 의심된다는 식의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어요. 


그러나 비평가들의 혹평과 달리 살롱 심사위원들의 낙점을 받지 못한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이 작품에 매료돼 마네 주변으로 모여들었으며 이들은 나중에 인상주의 사조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죠.


2년 뒤인 1865년, 마네는 또 한 번 대형 사고를 쳤어요. 살롱전에 그 유명한 ‘올랭피아’를 출품한 것이에요. 이번에는 아예 창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어요. 


비난의 파장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때보다 훨씬 거셌어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38년 제작한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올랭피아’는 알몸의 매춘부가 당당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이에요. 


퇴폐, 저질, 외설 논란의 중심에 선 ‘올랭피아’에 대해 마네는 “본 대로 그린 것일 뿐”이라고 대꾸했지만 관람객과 평론가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었어요. 


이런 가운데 에밀 졸라와 보들레르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진부한 미술 양식을 타파하고 혁신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라고 마네를 적극 옹호했어요. 


에드가르 드가,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등 인상주의 주류를 형성하게 될 젊은 화가들도 마네의 열렬한 팬이었어요.

에밀 졸라가 추모전 서문 써

1883년 4월, 마네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매독 합병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고통 끝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어요. 


이듬해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마네의 추모전이 열렸죠. 추모 전시의 도록 서문은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 에밀 졸라가 썼어요. 


공교롭게도 추모전이 끝난 뒤부터 마네는 유명세를 타게 됐고 그림 가격도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올랭피아는 마네가 1862년에 작업을 시작해 1863년 완성한 작품이에요.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0.5cm, 가로 190cm로 인상파 미술로 유명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 중이에요.


성적으로 문란했던 당시 파리 상류사회 남성들의 위선적인 측면을 신랄하게 고발한 이 그림과 관련한 소장 경로는 상당히 흥미로워요. 


마네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890년, 마네와 친분이 두터웠던 클로드 모네는 ‘올랭피아’와 같은 걸작은 프랑스 예술의 위대한 자산이라며 앞장서서 정부 기증을 위한 모금 운동을 펼쳤어요. 


마네의 미망인이 보관 중이던 그림은 이렇게 해서 뤽상부르미술관으로 옮겨진 뒤 1907년 루브르박물관, 1947년 죄드폼국립미술관을 거쳐 1986년부터 오르세미술관에서 전시 중이에요.

1865년 작품 공개 당시 외설 논란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빅토린 무랑.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로도 활동한 매춘부였어요. 


하얀색 침대 시트와 칙칙한 검은색 톤의 배경이 서로를 떠미는 강렬한 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마네는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라는 사실을 다양한 장치를 통해 드러내요. 


여자의 성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머리를 장식한 꽃을 시작으로 당시 창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벨벳 끈 목걸이와 비단 슬리퍼에다 오른 손목의 팔찌까지. 이뿐만이 아니에요.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방금 막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며 꼬리를 빳빳하게 말아 올린 검은 고양이는 남성의 심벌을 상징하죠. 


당시 매춘부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인 올랭피아를 작품 제목으로 정한 점과 마른 체형의 매춘부 선호 취향을 그림에 그대로 반영한 점, 관객이 그림 속 여인을 보는 게 아니라 거꾸로 여인이 우리를 보는 듯한 당당한 시선, 크게 벌린 왼손 엄지와 검지의 간격으로 육감적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노출한 점도 마찬가지예요. 

ⓒ 박인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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