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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유리벽 건물을 싫어한 이유

조회수 2019. 9. 27. 15: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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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독일의 근대건축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가 탄생한 지 100주년 되는 해예요. 그것을 기념한 듯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까지 개봉되었죠. 물론 대중에게는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대중이 바우하우스를 알 필요는 없죠. 


그들이 바우하우스에 대해 알든 모르든 분명한 건 현대인은 누구나 바우하우스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인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유리로 마감된 건물이죠. 자세한 내용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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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양식, 국제 스타일 되기까지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의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는 이 학교가 바꾼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요. 그중에는 시카고가 있죠. 특별히 시카고에 있는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건물을 오랫동안 비춰요. 


이 건물은 바우하우스의 세 번째 교장인 미스 반데어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최초의 유리 커튼월 마천루인데요. 유리 커튼월(glass curtain wall)은 철제 기둥으로 지탱되는 건물의 벽을 유리로 마감한 것을 말하죠. 


현대의 하이 테크놀로지가 탄생시킨 철골 건물에서 벽은 과거 건축과 달리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가 아니에요. 따라서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유리로 마감을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마치 ‘커튼’과도 같은 것이죠.

△바우하우스의 세 번째 교장인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최초의 유리 커튼월 고층 건물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는 1949년에 완공되었어요. 유리 커튼월 빌딩은 그 전에 지어진 돌로 마감한 고층 건물과 달리 완전한 직사각형 모양이 특징이죠. 이런 스타일의 유리 커튼월 빌딩은 오늘날 너무나 흔해요. 전 세계의 도시들이 이 건물을 모방했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1968년에 착공해서 1970년 완공된 삼일빌딩이 최초의 유리 커튼월 고층 빌딩인데요. 해방 뒤 김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건축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김중업이 디자인했죠. 


그런데 김중업의 삼일빌딩과 미스 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철골 유리 빌딩들, 특히 뉴욕의 시그램 빌딩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별로 없어요. 그저 단순한 사각 박스에 매끈한 유리로 마감되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양식을 국제주의 스타일이라고 불렀죠. 어떤 지역적 특징도 없고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힘들어서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디자인이기 때문이에요. 


대체로 건물 표면에 장식이 허용되어야 개성을 드러내기 쉽죠. 따라서 철골 구조에 유리로 마감된 고층 빌딩은 현대의 첨단 기술이 낳을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결과처럼 보여요.


하지만 그 양식이 정착하기까지는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야 했죠. 미스 반데어로에가 커튼월 고층 건물을 처음으로 구상한 것은 1920년이에요. 

△1939년에 완공된 나치의 제국 수상 관저. 창문이 굉장히 위쪽에 달려 있다.

20세기 초반에 이미 순도 높은 강철과 판유리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주재료로 건물을 만들 생각을 한 건축가는 거의 없었죠. 재료와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사람들은 여전히 돌로 짓고 고전 스타일로 디자인한 건물을 좋아했어요. 


더구나 1920년대 독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특히 점점 권력의 정점에 다가가던 극단적인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고전적인 건물과 디자인을 찬양하고, 바우하우스 같은 급진적인 학교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을 적대시했죠.


나치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왜 새로운 재료인 유리를 혐오하고 과거의 유물 같은 돌을 선호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첫째, 유리는 영구적인 재료가 아니라는 것이죠. 유리는 연약하고 깨지기 쉬워요. 반면 돌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남아 있죠. 


스톤헨지와 파르테논 신전을 보세요. 둘째, 유리가 가진 투명성을 거부했어요. 전체주의자들, 독재 권력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투명함이죠. 그들의 특징은 다른 이들을 철저히 감시할 수 있어야 하는 반면, 자신들은 철저하게 숨어 있어야 해요. 


그것이 나쁜 권력의 속성인데요. 히틀러가 총애한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디자인한 제국 수상 관저(히틀러의 집무실)는 고전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돌로 지었죠. 이 건물의 창문은 사람 키보다 훨씬 위쪽에 위치해요. 


따라서 이 건물 옆을 지나가는 행인은 마치 성벽을 따라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죠. 르네상스 시대 부유한 은행가들이 지은 팔라초(palazzo)가 외부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히 숨기도록 디자인한 것처럼 히틀러의 집 역시 타인에 대한 적대감, 자신을 숨기는 기능에 충실하도록 디자인한 것이랍니다.

투명성·저항성·반민족성은 사라지고…

△1925년에 완공된 데사우 바우하우스 빌딩은 유리 커튼월을 적용했다.

그러니 권력자들에게 통유리로 마감한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빌딩(1925년 완공)은 얼마나 위험하고 대담한 건물로 보였을까요? 유리는 안쪽을 훤히 드러내요. 모더니스트들은 집이든 사무실이든 커다란 유리로 속을 훤히 비추는 것을 좋아했죠. 


비평가들은 이런 집을 ‘수족관 집’이라고 조롱했어요. 수족관 속 물고기들은 인간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죠. 따라서 유리는 투명함과 정직함을 의미해요. 직장인의 수입과 지출을 ‘유리지갑’이라고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그렇다면 사장님의 지갑은 ‘돌지갑’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이렇게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재료는 1920년대 독일의 보수층에게는 대단히 반항적인 태도로 읽혔죠. 나치는 그것의 확산을 막고자 모던 양식을 반민족, 공산주의, 유대주의로 낙인찍었어요. 


나치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무리였다고 치더라도 일반인, 독일인뿐만 아니라 유럽인 전반이 유리 건물과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던 하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미스 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뉴욕의 시그램 빌딩. 유리 커튼월 마천루는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퍼져나가고, 이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늘 기술은 빠르게 진전하고 거기에 맞는 양식은 늦게 출현한다는 점이에요. 새로운 기술에 적합한 새 형식이 늦게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죠.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모더니즘의 국제주의 스타일은 마치 민주주의가 피를 흘리며 나아가듯 엄청난 투쟁을 겪으며 조금씩 세상 속으로 진입했어요. ‘유리 커튼월’이라는 상식이 돼버린 건물 양식은 처음 구상된 지 30년이 지난 뒤에야 첫선을 보였죠. 


그것이 보편적인 양식이 되면 그것에 들러붙어 있던 어떤 의미, 즉 투명성, 저항성, 반민족성(나치 독일의 경우에 한해서) 같은 것도 사라져요. 시간이 지나 로큰롤의 저항 정신이 사라지듯, 모던 양식 또한 그저 스타일 목록의 하나가 되었죠.

 

오늘날 유리로 만든 집은 더 이상 과거 유물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없이 그저 세련된 양식으로 선택되거나 거부될 뿐이에요. 심지어는 퇴물로 여겨지기까지 하죠. 세상은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게 변한답니다.

ⓒ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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