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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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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7월 1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익선동의 ‘독닙료리집’에는 일제강점기에 들었을 법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요. 1920년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 같은 구슬픈 노래였어요. 


손님들이 식당 내부에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큰 소리로 떠드는 이는 없었죠. 신한희망재단이 100년 전, 낯선 땅에서 독립투사들이 먹었던 끼니를 소개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식당은 6월 19일~7월 21일 한시적으로 운영했어요.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신한희망재단이 기획해 한시적 운영

6월 18일 서울 익선동 ‘독닙료리집’ 앞에서 시식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있다.│신한희망재단

독닙료리집 음식들은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먹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인데요. 과거 자료나 후손의 증언을 참고했죠. 김영진 셰프는 “손님들이 식사도 맛있게 드셔야 하기 때문에 기획한 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최종 결론을 낸 게 모양은 유지하면서 맛은 더 있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미를 담고 음식을 서비스하게 됐다”고 설명했어요. 메뉴판에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피해 쫓겨 다니며 드셨던 대나무 주먹밥 ‘쫑즈’, 지복영 선생의 간식인 ‘총유병’ 등 아홉 가지 음식이 있죠.


1920년대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절 살림은 지독히 궁핍했어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른 이후 중국 장제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배추를 주워야 할 만큼 상황이 어려웠죠. 


임시정부 청사로부터 400m 정도 떨어진 융칭팡에는 김구 선생과 어머니, 아내 최준례, 두 아들 ‘인’과 ‘신’이 살았어요. 김구의 아내 최준례 여사는 1924년 폐병으로 숨지는데요. 당시 김구 선생이 어머니가 담가주신 우거지김치를 동지들과 함께 먹었던 일화는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 영업자들을 제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질이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아무리 생각해도 상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 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인(仁)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함께 살며 어머님께서 담가두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백범일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 당시 드셨을 음식, 현대적으로 재현

총유병은 지복영 선생의 간식으로 알려진 음식인데요. 여성 동포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강조한 지복영 선생이 평소 즐겨 드셨던 중국식 파전병입니다. 안중근 선생이 의거를 계획한 후 하얼빈에서 드셨던 돼지고기 튀김인 꿔바로우도 있답니다.

다음 음식은 쫑즈예요. 김구 선생님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한 끼에요. 일제의 탄압을 피해 5년간 쫓기며 드셨던 대나무 주먹밥이랍니다. 프랑스에서 홀로 외교 전투를 하던 서영해 선생은 해산물 스튜와 밀빵을 드셨을 것으로 추정이 돼요.

하와이로 넘어가 식탁을 살펴보면 대구무침이 있어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즐겨 이민 3세대에게도 민족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답니다. 홍샤로우는 오건해 선생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대접했던 돼지고기 요리랍니다.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가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배춧잎으로 만들었던 김치찜은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절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음식이에요. 임시정부 요인들의 반찬을 담당했던 납작두부볶음도 요인들의 허기를 달래줬어요.

양미리 더덕 고추장 구이는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느라 형편이 넉넉지 않던 김용환 선생이 의용대에 대접했던 음식이에요. 또, 조선식 냉채는 이동녕 선생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더위를 식히기 위해 드신 음식이랍니다.

‘그의 음식 맛 못 봤으면 임정 요원 아니다’

오건해 선생의 외손녀 박천민 씨가 차린 식탁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간식이었던 루빙(맨 오른쪽), 돼지고기 요리 홍샤오로우, 짠지의 물기를 빼 기름에 볶은 짠지볶음, 납작두부볶음 등이 놓여 있다. 3월 7일 방영된 KBS <한국인의 밥상> 출연당시 박씨가 직접 요리한 음식이다.│KBS 화면 갈무리

오건해 선생은 오랜 타국 생활로 병약해진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에도 정성을 다했어요. 1937년 무렵 병약해진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온 정성을 기울였죠.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했어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13일, 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했죠. 오건해 선생은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는데요. 


박찬익은 1940년 화평로 청사 화재로 머리를 다쳤을 때와 연화지 숙소가 일제의 폭격으로 무너져 어깨 부상을 당했을 때 오건해와 딸 신순호의 간호로 회복될 수 있었어요. 오건해 선생이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간호한 일화도 전해지죠. 


1938년 5월 6일, 김구가 후난성 창사에서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맨 이른바 ‘남목청 사건’ 때 일이에요. 한인 독립운동 세력 간 갈등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요. 


중상을 입은 김구는 즉시 상아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중국 의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방치했어요. 사망 통지를 받은 김구의 장남 등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창사로 급히 달려왔죠. 


그런데 김구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면서 응급치료가 진행됐어요. 오건해 선생은 김구가 퇴원 후 요양할 때 식사 등의 봉양을 맡았죠. 정부는 이런 공로 등을 인정해 2017년 고(故) 오건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답니다. 


임시정부는 1945년까지 26년 동안 중국에서 활약했어요. 많은 이가 상하이 임시정부만 기억하지만 활동과 근거지를 기준으로 임정은 대략 세 시기로 나뉘는데요. 


상하이 시기(1919~1932년), 장정(長征) 시기(1932~1940년), 충칭 시기(1940~1945년)에요. 충칭 시기에 김구는 홀로 시내에 머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는데 이때에도 거의 모든 숙식을 오건해 선생이 맡아 보살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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