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아픔 보듬는 봄 여행, 강원도로 함께 떠나~보드래요!

조회수 2019. 5. 20. 15: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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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가고 바야흐로 봄이 찾아왔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와 함께 가벼운 가방 하나 둘러메고 떠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여행 떠나기 좋은 봄철을 맞아 〈위클리 공감〉이 테마 여행하기 좋은 특별한 여행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위클리공감 홈페이지 원문 보러 가기

강원도 강릉~고성

 

화진포 호수 주변에 있는 사랑의 열쇠에 자물쇠가 걸린 모습

오죽 무서웠으면 화마(火魔)라고 불렀을까? 산불의 생채기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4월 초 강원도 동해안의 숲과 가옥을 태운 산불의 흔적은 20여 일이 지났지만 그날의 공포스러움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데요. 


불길에 휘어버린 철골, 앙상히 뼈대만 남은 승용차, 불타버린 가옥에는 정적만이 감돕니다. 산불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고성과 속초의 중심 도로를 자동차로 지나치는 외지인들은 누구나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 산불의 진한 아픔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까요? 전국에서 답지하는 온정의 힘으로 차츰 치유되고 있으나 잔뜩 움츠러든 지역 관광경기는 좀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초의 이름난 맛집인 아바이마을의 ‘옥이네 밥상’. 꾸덕꾸덕한 반건조 생선구이와 각종 젓갈 백반으로 항상 손님이 줄을 서야 했던 이 집은 불이 나기 전 주말에는 하루 수백만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산불이 난 뒤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매출이 형편없이 줄었는데요. 하루 10만~20만 원의 매출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속초가 이 정도이니 고성의 산불 피해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안목해변 카페에선 커피 향 진동 

코레일은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KTX의 가격을 30% 할인해주고,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서울역에서 “강원도민을 도와주는 길은 강원도를 찾아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외치며 ‘Again Go East’ 캠페인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동해 바다를 옆으로 끼고 달리는 7번 국도는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도 만끽할 수 있어 낭만을 즐기려면 가야 하는 필수 코스인데요. 산불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강원도민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강원도로 가~보드래요. 


먼저 동해안 해안가입니다. 강문해변은 경포해변의 남쪽에 있는 해변으로 강문항과 인접해 있어 횟집으로 유명하다. 모래사장에는 사진 찍을 포인트가 많은데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액자 틀 안에 들어가 찍으면 인증샷으로 그만입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조형물이 많아 다양한 포즈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안목해변에는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줄지어 있어 연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데요. 


주문진 쪽으로 가다 보면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한 방파제가 젊은이들의 인기를 아직도 끌고 있습니다. 라이터를 켜보고, 성냥을 켜봐도 공유는 나타나지 않지만 방파제 끝에 서서 연인을 찾는 애절함을 온몸으로 표현해봅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녘 손에 잡힐 듯
화진포의 성 옥상에 있는 전망대 망원경의 모습

고성 화진포로 달려봅시다. 화진포로 가는 도중에 보이는 속초와 고성 시내의 산불 피해 상처는 외면하지 맙시다. 그런 상처를 딛고 우리의 이웃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화진포는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로도 유명해졌지만 병풍처럼 늘어선 산이 수묵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호안선 길이 16㎞의 화진포 주변에는 ‘화진포의 성’으로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 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습니다. 


19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 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계단에 붙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화진포의 성은 애초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인 셔우드 홀 부부가 1938년 독일 건축가 베버에 의뢰해서 지었습니다. 셔우드 홀은 1928년 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위해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습니다. 

화진포의 성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다 위에 마주 보이는 금구도(金龜島)입니다. 화진포 해변에서 300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 데다, 가을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겨울철에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를 비롯한 철새가 군무를 펼칩니다. 이 무인도에는 화강암으로 축조한 2층 구조의 성벽과 보호벽 등의 흔적이 있어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한 곳이라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 


화진포의 성 옥상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북쪽 산하를 보며 잠시 조국 통일의 즐거운 상상 속에 빠져봅시다. 이번엔 민통선 바로 아래에 있는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로 가봅시다. 


이 절은 1930년대만 해도 국내 4대 사찰에 들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습니다. 지금은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지만 당시는 거꾸로 신흥사와 낙산사를 거느린 본사였는데요. 


1878년 4월 3일 산불로 전소되기도 했는데, 당시 불에 탄 규모가 3183칸이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일으킨 터전이기도 합니다.  

사명대사 승·의병 일으킨 터전

 

세상에 단 두 곳(스리랑카, 한국)에만 봉안된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사찰로도 유명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의 칙령을 받고 당나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아와 오대산 월정사와 양산 통도사에 봉안했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통도사 금강계단을 부수고 약탈해간 치아사리 12과를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했습니다. 대웅전 옆 염불원에서는 투명한 ‘석가세존 치아사리함’(5과)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석가모니의 치아로 검게 변색됐습니다. 적멸보궁의 사리탑에는 3과가 봉안됐는데요 1986년에는 4과를 도둑맞기도 했는데, 범인이 자발적으로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도둑이 꿈을 꾸었는데 할아버지가 나타나 훔친 치아를 돌려주지 않으면 후손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 절은 6·25 전란에 완전히 폐허가 됐는데 당시 현존했던 당우는 모두 624칸이었습니다. 오직 한 당우만 전란을 피했는데, 바로 절 입구의 불이문(不二門)입니다. 


이 현판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으로 큰 글자를 특히 잘 썼던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이 썼는데요. 불이문은 절로 들어가는 3문 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입니다. 


‘불이’는 진리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가 전개되고,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해탈문이라고도 합니다.

 

산신각에도 들러봅시다. 산신각은 산의 주인인 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불교와 관계없는 도교 관련 시설인데요. 불교보다 먼저 들어와 민간 사상과 유착된 도교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신각은 대부분 사찰의 대웅전 뒤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절의 산신각에 모신 산신령은 그림이 아닌 목각으로 조각돼 있어 마치 살아 있는 듯 느낌이 생생합니다. 

장군샘 물 한 모금에 온몸 생기 
‘금강산 건봉사’의 대웅전 가는길의 능파교

대웅전으로 통하는 돌다리는 이름이 독특합니다. 능파교(陵波橋). 능파는 가볍고 우아한 여인의 걸음걸이를 표현하는 말로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가 있는데요. 


중국 위나라의 조식(192~232)이 쓴 낙신부(洛神賦)에 ‘陵波微步 羅襪生塵’(능파미보 나말생진·물결을 밟아 사뿐히 걸으니 버선 끝에 먼지가 인다)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아하게 가슴을 펴고 능파교를 건너봅시다. 이 절의 샘물은 이름이 장군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스님 700여 분이 수행할 만큼 전국 최대 규모의 절일 수 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마실 물이 풍부했기 때문인데요. 청량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쉬고, 맑은 물을 쭉 들이켜면 몸 세포가 활발히 가동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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