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아픈 역사 살펴보는 '부여 다크 투어' 여행지

조회수 2021. 5. 11. 16:39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삼천궁녀가 뛰어내린 '낙화암'부터 '신궁 터', '이몽학 파가저택지'까지, 아픈 역사를 살펴 보는 '다크 투어'를 다녀왔습니다. 이길우의 기고에서 역사 속 숨은 이야기를 함께 들어볼까요?


▶드론으로 촬영한 고란사(왼쪽 아래)와 낙화암(중간 정자 아래 바위).그리고 부여를 휘감아 도는 백마강. 낙화암은 높이가 60m로 아찔하다.

높이가 60m나 되니 아찔합니다. 오르는 산길도 가파른데요. 바위 위에는 십여 명이 서 있기도 비좁아요. 아래 흐르는 강물을 보니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이곳에서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이 떨어져 자살했다고 해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패자는 망할 이유가 분명해야 하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주색잡기에 빠져 나라를 망친 인물로 각인돼 있어요.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건국된 백제는 4세기 중반 북으로 황해도부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영토에 포함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백제가 망하던 날,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은 부소산성 뒤쪽의 낙화암에 몰려가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드라마 같은 표현을 보탭니다. 떨어져 집단 자살하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며 자살한 바위를 낙화암(落花巖)이라고 불렀죠.


당시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분명 과장일 거예요. 의자왕이 향락을 추구하고 충신의 말을 무시해 백제가 망했지만 그때 의자왕의 나이가 60대 중반인 것도 역사의 과장에 무게가 실리죠.


낙화암 삼천궁녀의 처절한 죽음

백마강 위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낙화암을 바라보니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의자왕의 후궁들은 나당 연합군에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바위에서 떨어져 자살을 선택했을 거예요. 낙화암이 자살한 여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하니 당시 처참함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목숨을 내던지는 여인들의 처절함을 감안하면 꽃으로 비유한 것도 적절치 못한 것 같아요.


함께 배를 타고 부여의 역사를 설명해준 '윤재환의 신 부여팔경'의 저자 윤재환(60) 씨는 아픈 역사를 살펴보는 다크 투어를 제안합니다. 첫 번째 유적지가 낙화암인데요. '삼국유사'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고 기술하고 있어요.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고 수십 명의 후궁이 삼천궁녀로 과장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당 연합군에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태종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어요. 그리고 태자와 왕자를 포함해 백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죠. 그렇게 700년 역사의 백제가 사라졌습니다. 한 지도자의 사치와 향락이 백성의 운명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가늠하게 해요.

▶궁남지의 연못. 궁남지는 전국에서 연꽃이 가장 큰 규모로 피는 백제시대 만든 인공 연못으로 유명하다.

“혹시 부여신궁을 아시나요?” 배에서 내려 부소산성을 들어서며 윤 씨가 물어보는데요. 처음 듣습니다. 신궁(神宮)이라면 일본과 관계가 있는 유적지일까요? 부소산성 입구에서 가까이 자리 잡은 사당이 삼충사(三忠祠)입니다. 삼충사는 백제 의지왕 때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지은 사당인데요. 성충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고 흥수는 간언을 하다가 유배됐어요. 계백은 나당 연합군과 황산벌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런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 터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동근동조(同根同祖)를 강조하기 위해 건설했던 신궁 터라는 것입니다.


일제 잔재물 부여 신궁 터

윤 씨는 그 증거로 신궁으로 통하는 터널 입구를 보여줬는데요. 삼충사 진입구 숲 속에 시멘트로 만든 동굴 입구가 흙에 매몰된 채 상부만 일부 노출돼 있습니다. 이 동굴은 일제가 당시 첨단 건축 자재인 시멘트로 만든 신궁으로 통하는 곳이었어요.


아무런 안내문이 없는데요. 윤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 초반 이 동굴 속에서 놀았다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동굴 입구에서부터 수십 미터를 계속 가다보면 계단이 나타났고 그 위쪽에 희미한 햇빛이 비췄다고 말했죠. 나이가 들어 그곳이 부여 신궁 터 일부이고 일제가 대규모로 짓던 부여신궁이 패망과 함께 중단됐으며 그 신궁 시멘트 기초 위에 삼충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부소산성 근처에 살던 윤 씨는 당시 신문 기사와 문헌으로 부여신궁의 모습을 오랫동안 추적해 부여신궁의 설계도까지 입수했어요. 동굴은 높이가 2.3m나 되고 성인 두세 명이 줄지어 걸을 수 있는 크기인데요. 신궁이 완공되면 제관들이 지하 동굴을 통해 신사에 입장하는 신비감을 연출하기 위해 동굴 입구를 만든 것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화를 위해 건축했던 부여신궁의 입구 터널. 높이 2m가 넘는 큰 터널은 흙으로 매몰돼 입구만 살짝 노출돼 있다. 오랫동안 부여신궁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해 온 윤재환 씨가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가 대규모로 건설하려던 부여신궁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설계도에 따르면 입구 동굴의 길이가 45m이고 22만 평의 대지에 본전과 축사전, 내배전 등 여러 건물이 자리 잡아 일본 본토를 포함해 가장 큰 신궁를 건설하려 했다고 해요. 1937년 공사를 시작해 8년간 공정의 80%를 진행해 대부분 건물이 지어졌으나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해방 이후 부여청년동맹원들이 건설 중인 신궁을 모두 파괴해 지금 부여신궁의 흔적은 입구 동굴만 있는 셈이죠.


놀라운 것은 이 신궁 터 건설에 일제가 전국 청소년 10만여 명을 동원했다는 점이에요. 신궁 터 정지 공사에 청소년들을 2박 3일간 합숙·동원해 공사를 시키고 내선일체 등의 정신교육을 해 황국신민으로 정신을 개조하는 작업을 했어요.


윤 씨는 “일제가 자행한 부여신궁 건립을 지금이라도 자세히 파악해 뼈아픈 질곡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소산성 내에 부여신궁 지하 시설물을 놓고 부여 지역민 사이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제 잔재물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고 합니다.


실패한 혁명을 향한 처절한 응징

윤 씨가 소개한 숨겨진 또 하나의 다크 투어 유적지는 이몽학 파가저택지인데요.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 669번지 논 한가운데 황폐하게 버려진 연못이 있습니다. 주변의 논이 잘 정돈된 것에 견줘 이 집터는 잡초가 무성하고 물이 고여 있어요.

▶임진왜란 중에 민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몽학의 생가는 파괴되고, 집터는 후손이 살지 못하도록 연못으로 만들었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연못으로 남아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민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몽학의 집터입니다. 이몽학은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서울에 살다가 행실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전전했는데요. 임진왜란 중에 장교(將校)가 됐으나 백성들이 흉년과 관리들의 침탈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무량사에서 모의를 하고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반란군을 규합해 한때 휘하에 3만 명의 군사를 모아 세를 이뤘죠.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은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해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 정산현, 청양현, 대흥현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공격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몽학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소재로도 등장하는데요. 임진왜란 초기 의주로 피신한 선조를 향한 백성의 원망이 높았어요. 또 관리들의 부패에 불만을 품은 농민을 규합해 거사를 일으킨 이몽학은 역적이 돼 저잣거리에 목이 걸리고 다시는 후손이 살지 못하도록 집터를 연못으로 바꿔놓았죠.


연못으로 변한 집터는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물구덩이입니다. 이몽학 파가저택이라고 적힌 팻말도 땅바닥에 처박혀 설명을 듣지 못하면 논 한쪽에 왜 연못이 있는지 알 수 없죠. 실패한 혁명을 향한 처절한 응징의 흔적입니다.


ⓒ이길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