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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200만 명 찾던 백운산 자락 매화 명소?

조회수 2021. 3. 16. 17: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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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무려 200만 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매화 향기에 빠지곤 했던 '광양 청매실농원', 올해 매화 축제는 아쉽게 취소됐는데요. 이길우의 공감 기고글로 매화가 활짝 핀 '2021 광양 청매실농원의 봄'으로 함께 가볼까요?




퇴계 이황은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시대 평균 연령이 35세인 것을 감안할 때 장수한 셈이다. 이황은 말년에 다른 선비들처럼 매화 분재를 곁에 두고 사랑을 쏟았다. 매화 분재를 이황은 매군(梅君), 매형(梅兄), 매선(梅仙)이라고 부르며 감정을 교류했다. 임종 즈음에 이황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없더라도 저 매형에게 잊지 말고 물을 주어라.”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 역시 매화 마니아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김홍도에게 매화나무를 팔려고 왔다. 하지만 김홍도는 돈이 없었다. 그는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고, 그림을 받고 사례비로 3000냥을 지불했다. 김홍도는 2000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마셨다. 이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고 한다.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도 시 〈광야〉에서 매화 향기를 노래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 이육사도 시 〈광야〉-

섬진강 변 백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청매실농원



봄이 오면 모두를 설레게 하는 매화를 영접하려면 우리 조상의 매화 사랑을 떠올려야 한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반갑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매화는 벚꽃과 모양은 비슷하나 벚꽃에는 향기가 없고, 매화에는 향기가 난다. 성질이 급한 어떤 매화는 눈 내리는 겨울에 꽃을 피운다. ‘설중매(雪中梅)’다. 왠지 가슴을 뛰게 하는 이름이다.



▶청매실농원 언덕에 피어 있는 홍매실


선비들이 특히 매화를 좋아한 이유는 추운 날씨에도 꽃을 피우는 굳은 기개와 은은하게 배어나는 향기, 즉 매향(梅香) 때문이다. 비록 코로나19로 매화 축제는 취소됐지만 전남 광양 홍쌍리 청매실농원을 바라보며 매화 사랑에 빠져보자.

행정구역상 광양이지만 하동에서 가깝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청매실농원은 봄이면 매화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한 해 무려 200만 명이 매화 향기에 빠지곤 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홍매화는 붉음이 푸름을 배경으로 하면 얼마나 치명적인지 실감케 한다.


▶백매화는 멀리서 보면 뭉게구름처럼 보인다.


눈이 부시게 흰 백매화는 산 중턱에 마치 뭉게구름이 걸쳐 있는 듯한 풍성함을 선사한다. 또 하얀 꽃에 푸른 기운이 도는 청매화도 빼놓을 수 없는 청매실농원의 매화다. 일단 농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방 천지에 피어난 갖가지 매화는 누구나 속세의 찌든 때를 집어던지고, 선계(仙界)로 빨려들게 한다. 17만m² 규모의 너른 땅에 10만여 그루의 매화나무는 말 그대로 ‘봄의 교향악’을 연출한다.


▶2500여개의 큰 장독에는 고추장과 된장이 익어간다. 장독대 주변에 매화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농원 입구의 대규모 장독대도 농원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무려 2500여 개의 장독이 군대를 사열하듯 반듯하게 정렬돼 있다. 각각 보기 드문 큰 장독이다. 모두 193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숨 쉬는 장독이라고 한다. 장독 속에는 된장과 고추장 등이 시간을 먹으며 숙성해간다. 매실과 궁합이 잘 맞는 대표적인 슬로우 푸드다. 그런데 왜 1930년대 이전의 장독일까?


플라스틱 그릇은 냄새가 나고, 유리그릇은 큰 게 없고, 쇠는 매실과 안 맞는다. 그리고 요즘 만든 장독은 숨을 못 쉰다. 흙과 유약이 이전 것과 다른 탓이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술을 만들 때 오크통이 필요한 것처럼, 고추장 된장을 만들 수 있는 제대로 만든 장독이 있어야 한다. 이 장독은 숨을 쉬면서 독 안에 곰팡이가 피게 해 발효를 진행시킨다.




궁핍했던 산골 마을이 매화의 ‘꽃 대궐’로



장독대에서 홍쌍리(78) 여사를 만났다. 이 매실 농원을 54년째 가꾸고 있는 든든한 주인장이다. 두 손에 눈길이 간다. 아! 평생 농사지은 손이다. 햇볕에 검게 탄 피부와 뭉뚝한 손마디, 그리고 곳곳에 자리 잡은 딱딱한 군살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저 손으로 이 황량한 산을 매화의 ‘꽃 대궐’로 만들었다. 궁핍했던 이 산골 마을을 부자 마을로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덥썩 잡아본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손길이 온전히 느껴진다.



▶홍쌍리 여사의 주름진 손 모습


밭일을 하던 중이었다. 햇볕을 가리려고 쓴 챙이 큰 모자와 통이 큰 편한 바지. 연매출 수십억 원의 농원 주인이 아닌 일당을 받으려고 일하러 온 동네 할머니 모습이다. 지금도 새벽부터 밭일을 한다. 23세에 결혼해서 이곳에 자리 잡고, 24세부터 매화나무를 심었다. “왜 매화나무를 심으셨나요?”


“그때는 매실은 줘도 안 먹던 시절이었죠. 매화꽃이 좋았어요. 5년 후면 꽃이 피겠지, 10년 후면 소득이 있겠지, 20년 후면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매화나무를 심었어요.” 그런 막연한 꿈은 현실이 됐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홍 할머니의 염원대로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매년 3월 중순 매화꽃이 절정을 이룰 때면 매화 축제가 열렸다. 축제 기간엔 매화꽃 달빛음악회와 매실음식경연대회, 매화사진촬영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젊은 시절의 홍쌍리 여사가 매실을 따며 즐거워하는 모습



경남 밀양에서 팔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홍 할머니는 1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6세 때 작은아버지가 계신 부산으로 갔다. 작은아버지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했다. 그 가게에서 장사를 배웠다.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 중 광양에서 밤을 가져오는 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징용 가서 모은 돈으로 광양에서 밤나무 농원을 하던 김오천 씨였다. 홍 할머니를 며느리 감으로 점찍었다. 5년간 계속된 김 씨의 간청에 넘어갔다.


결혼 후 산속에 갇혀 사니 외로웠다. 마침 시아버지가 밤나무 곁에 일본에서 가져온 매화나무를 심었다. 매화꽃은 예뻤고, 매실은 약이 됐다. 29세에 병에 걸렸는데, 매실을 먹고 완쾌했다. 시아버지에게 매실을 약으로 쓰는 법을 배웠다. 매실농축액이 만병통치약이었다. 내장 청소에 그만이었다.



▶청매실농원을 만든 홍쌍리 여사가 대규모 장독대에서 환하게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점차 밤나무를 베어내고 모두 매화나무로 심었다. 매일 밥상에 올려 매실을 먹을 방법을 궁리했다. 매실장아찌, 매실물,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주 등이다. 매실 명인이 됐다. 지금은 매실 관련 상품 수가 50가지에 이른다. ‘홍쌍리’라는 이름 석 자를 브랜딩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전통식품 명인 제14호로 지정됐고, 농업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대산농촌문화상’도 받았다.



“매화꽃은 딸이고, 매실은 아들입니다”



홍 할머니는 처음부터 농약을 뿌리지 않는 유기농법을 고집했다. 매화나무 밑에 보리를 심는 것도 그가 발견한 재배 방법이다. 보리의 잎은 매화의 해충을 제거하고, 뿌리는 공기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해 매화나무를 보호한다.

“매화꽃은 딸이고, 매실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매실 딸들이 나를 보고 펑펑 우는 겁니다. ‘왜 우니?’ 하고 물었더니, ‘마스크를 쓰고 온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사람들이 내 앞에서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놀아야 하는데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눈물이 나요’라고 대답해요.” 홍 할머니는 이렇게 매화나무와 이야기하면서 산다.



비록 국민학교 학력이지만 그는 밭일하며 틈틈이 시(詩)를 써 시집 〈행복아 니는 누하고 싶고 싶냐〉라는 시집도 냈다. 〈미안하다 내 손아〉라는 시를 읽어보자.



▶청매실농원의 화분에 홍매화 꽃잎이 떨어져있다.
무쇠 솥뚜껑 같은 내 손아
처녀 때 곱던 모습 어디 가고
밭맬 때 손톱 밑에 피가 삐죽한 내 손아
트고 갈라지고 시리고 아파서 눈물 질금 나던 내손아

내 손이 이렇게 말하네
“어매 니 손 밤에는 좀 쉬면 안 될까?
그렇게 한평생 살아온 어매 니 손 꼬라지 좋다”
그래도 이렇게 든든한 내 두 손 있어
고맙다 내 손아.
〈미안하다 내 손아〉

ⓒ이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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