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김정수 화가의 진달래

조회수 2019. 1. 15. 00: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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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과 김정수 화가는 분야는 다르지만 더없이 한국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는 예술가입니다. 두 예술가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과 감성을 들어볼까요? 

위클리공감 홈페이지에서 원문기사 보러가기


“마른 풀잎이었습니다.”

어째서 마른 풀잎일까요? 그 수많은 풀잎 가운데 햇빛에 시들어가는 마른 풀잎. ‘섬진강 시인’ 김용택(71)이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저는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입니다.”

봄날 뒷산에 만개한 연분홍빛 진달래. ‘진달래 화가’ 김정수(63)의 어머니 이미지예요. 


한국적 감성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시인과 화가의 대화는 ‘어머니’로 시작됐어요. 차가운 강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한복판, 섬진강 중류의 강가에 자리 잡은 김용택 시인의 작업실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과한 따스한 햇살로 가득 차 포근했어요.

가출하는 아들을 잡고 어머니는

“무작정 도시로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리를 키우다가 망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오리를 키웠는데, 사료 값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검정 고무신에 철 지난 잠바를 걸치고 춥고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지요. 눈물이 나더군요.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달려오고 계셨어요. 


어머니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어요.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어요. 펴보니 2000원이었어요.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용택아, 어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 한다. 꼭 편지하고, 알았자?’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돌아서서 뛰었어요. 얼마를 뛰다가 길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봤어요. 그때까지 어머니는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어요. 마른 풀잎 같은 손길이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강을 배경으로 눈물의 이별을 했던 어머니의 아들을 향한 애틋함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눈앞에서 선명하게 재현되는 듯해요. 

중학교 입학 실패 후 방황했지만...

“저도 가출을 했어요. 문제아였지요. 가고 싶은 중학교에 재수를 하고도 떨어졌어요.”


고향이 부산인 김 화백의 가출은 현실도피였어요.

“첫해는 몸이 약해 체력장에서 실패했기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다시 도전했는데 또 실패했어요. 방황이 시작됐지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싸우기도 했고…. 급기야 가출까지. 부모님은 가출한 나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어요. 어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귀가하라는 광고를. 그 광고를 본 친구 어머니가 보고 나를 설득했어요.


귀가하니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으시고 나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갔어요. 손길이 부드러웠어요. 마침 산에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어요. 어머니는 한참 꽃을 바라보시더니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어요.


‘수야!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라. 때가 되면 꽃은 이렇게 활짝 핀단다.’ 순간 어머니가 다시 보였어요. 그 어떤 시인보다 멋진 시어를 말씀하셨고, 어떤 여배우보다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깊은 후회와 함께 깨달음이 찾아 왔어요. 그래, 조금씩 준비하고 노력하며 기다리자. 때가 되면 기회는 올 거야.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했어요.”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노래 ‘애모’에 소름

김 화백에게 물었어요. “왜 진달래를 그렸나요?” 진달래만 그린 지 25년째. 김 화백의 진달래 그림은 지금 가장 ‘핫'해요. 그림을 달라고 화상들이 줄을 서고 있어요. 


“홍익대 미대를 다니다가 프랑스에서 화가로 생활했어요. 반은 한국인, 반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요. 그런 나를,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고 가슴 깊이 새겨준 것은 다름 아닌 유행가였어요. 


전시회 때문에 일시 귀국해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당시 유행하던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애절한 전주에 이은 첫 소절 가사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어요.


그때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가장 한국적인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거죠. 그러고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어요. 


자연 중에서도 꽃. 꽃 중에서도 길가에 핀 야생화. 수많은 한국 문학가의 소설과 시를 읽었어요.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바로 진달래였어요. 그런 진달래는 곧 어머니 이미지와 연결됐고, 그래서 진달래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한국 산천 풍경의 색깔이 가장 한국적


섬진강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사는 이야기를 쉽고도 친숙한 시어로 표현한 김 시인에게 ‘한국적이란 정서’가 무엇인지 물었어요. 


“삶의 형태가 한국적이라는 것은 이미 사라졌어요. 인정이 넘친다거나 공동체 삶이 한국적인 시대는 지났지요. 한국적인 풍경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꼽고 싶어요. 


부드러운 산 능선과 굽이치는 강굽이, 경지 정리가 덜 된 논과 밭, 무심히 서 있는 나무들. 특히 산천의 색깔이 한국적입니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초봄, 산에는 노란 생강나무 꽃에 이어 진달래꽃이 핍니다. 그럼 산천은 보랏빛 색깔이 됩니다. 물기가 본격적으로 나무에 오르는 늦봄이 되면 산천은 검어집니다. 산의 나뭇잎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넘어갈 즈음이죠.”


시인과 화백과의 대담 덕인지 평화로움이 산천에 가득합니다.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로 지고 강물이 자려고 준비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계시는 두 예술가의 이야기 잘 들으셨나요? 두 분의 작품을 더 찾아보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느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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