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된 옛 여관, 통의동 보안여관

조회수 2018. 11. 30. 13: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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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 보안여관은 70여년 간 숙박업소로 운영된 곳이에요. 경복궁과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해서 근현대사의 많은 이야기와 함께 하는데요. 과거를 품은 공간이지만 미래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운영된지도 벌써 11년이 되었습니다. 11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 '아모르 파티'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보안여관 미술관 이야기 함께 들어봐요. 


출처: http://www.boan1942.com/boan
그때 보안여관의 주인이 훗날 우리 시어머니가 된 분의 오라버니인 박동일 씨였어요. 그분의 마나님이 도쿄여자대학 출신이고 일본말도 하고 그러니까 총독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이 왔고 고급 여관이었지요. 지금으로부터 딱 70년 전에 박동일 씨가 보안여관에서 2 대 2 맞선을 주선했어요. 어느 날 맞선을 보면 어떻겠냐는 전보가 왔죠. 당시 ‘위안부’ 문제도 있고 해서 시집을 가야 했기에 인천에서 통의동 보안여관까지 선을 보러 갔어요.

(보안여관에서 맞선을 봤던 박정희 할머님)

그때는 여기가 손님이 별로 없었어. 오래된 여관이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여기 근처에 조선총독부가 있으니까 드나들던 사람이 많이 잤다고 해.…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을 지으면서 적선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지방에서 오는 공무원들이 다 보안여관에서 자긴 했지.

(1983년 통의동에 이사와 통의동 통장을 맡았던 장지웅 씨)

문학의 밤 행사가 끝나고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할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잠깐만, 더 내려가 보세. 여기 내 추억의 장소가 있네’ 하시더군요. 그래서 학교가 위치한 청운동에서부터 통의동 보안여관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지인 이경철 씨)

-‘여관 전설 :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 인터뷰 중에서

보안여관은 서울 경복궁 영추문 대각선 방향에 있어요. 현 주소 효자로 33번지(통의동 2-1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관원들이 대궐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잠시 머물던 대루원이 있었어요.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안여관은 경복궁과 청와대라는 시대의 최고 권력기관을 지근거리에 둔 범상치 않은 곳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켜켜이 쌓아왔어요. 실제 2004년까지 여관으로 영업했으니, 보안여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스펙트럼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2007년부터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보안여관이 1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시(2018.11.1~25) ‘아모르 파티’를 열었습니다. 대중가요로 우리에게 친숙한 전시의 제목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운명애(運命愛)적 의미도 담고 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는 크게 ‘기록되지 못한 역사’와 ‘사라지는 풍경’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시 ‘내일 없는 내일’과 1930년대부터 2004년까지 이어온 여관의 장소적 고유성과 경험, 기억의 아카이빙 전시 ‘여관 전설: 통의동 보안여관’ 그리고 근대 경성부터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송고은 큐레이터는 “동시대 문화예술기관의 활동은 10여 년 남짓이지만 보안여관이라는 공간은 그 몇 배가 넘는 시간의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다”면서 “관람객들은 전시의 작품보다 보안여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아우라나 흔적을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았고, 10여 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보안여관과 비슷한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사회적으로 또 다른 상품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비판적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서울의 70년을 품은 보안여관

출처: http://www.boan1942.com/boan

궁궐의 위풍당당한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 보안여관은 1930년대 이전부터 수많은 객인이 지나쳐간 장소에요. 1940년대 전후 서정주, 김동리 같은 문학인들부터 1980년대 근처 미술관과 각 국무부처에서 일했던 공무원과 잠시 지방에서 출장을 다니러 온 사람들, 2000년대 싼값에 서울 시내에 머무르고자 했던 장기투숙자 등 보안여관은 이런 모든 이들의 밤을 품어주는 공간이었어요. 서울의 70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셈이에요.


보안여관의 외관은 하나의 거대한 설치미술을 방불케 합니다. 깊은 가을의 생생한 계절감을 보여주는 노란 은행나무 잎과 대비되는 짙은 갈색의 타일 벽 무늬는 어딘가 통의동스럽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손님을 호객하던 파란 정자체의 보안여관 간판은 요즘 말로 무척 ‘힙하다’로 표현할 수 있어요.


옛 목재 골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보안여관 내부는 그 아우라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낮은 천장과 좁고 긴 복도 양옆에는 1호, 2호, 3호로 이어지는 객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요. 신문지로 바른 벽에는 못 자국과 그을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어떤 객실은 분홍색 꽃무늬 벽지에 노란 장판이 여전해 흡사 1980년대 드라마 세트장 같은 느낌을 받아요.


일본식 천장 ‘덴조’를 철거한 후 드러난 낡은 서까래와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있는 전선들까지 보고 있자면 시대와 세월이 마치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하게 교차된 유적지 같은 인상을 줍니다.


보안여관의 ‘여관’으로서 기록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당 서정주는 자서전 <천지유정>에서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서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고 적고 있어요. 이 시기에 이미 여관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공식 문서는 1938년 운영주 ‘이유숙’이란 이름으로 ‘세금 31.60원’이라고 경성상공명부에 적혀 있는 것이 최초입니다. 당시 최소 30원 이상의 세금을 내는 업소만 명부에 올랐다니 제법 장사가 잘됐던 모양이에요.


보안여관 문화재 시굴조사 당시 발견된 상량패에는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적혀 있는데, 당시 기록이 증축한 것이라는 게 중론이에요. 보안여관과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신관 건물 2층 보안책방 아카이빙 섹션에 가면 최초로 전시된 보안여관 상량패와 당시의 숙박요금표, 서촌 일대 지도와 숙박객들의 증언 인터뷰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 서쪽 서촌에 위치한 보안여관은 예로부터 한옥이 밀집한 양반 동네 북촌과 달리 초가집이나 서민들이 살던 벽돌집,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들이 많은 서민 동네였어요. 그런 탓이었을까. 서촌은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의 터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를 개척한 겸재 정선이 벗들과 노닐었고,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무명의 화가 허련을 가르쳤으며, 일제강점기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묘사한 그 ‘막다른 골목’도 바로 통의동 골목이에요. 그러가 하면 앞서 언급한 1930년대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던 ‘시인부락’이라는 문학동인지도 서정주 시인이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하숙하며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시인 등과 함께 만들어낸 거예요. 

출처: http://www.boan1942.com/boan

그뿐만 아니라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문화공보부 공무원 시절이던 1960년대 초 이곳에서 대통령 보고용 자료를 만들었고, 소재구 초대 국립고궁박물관장이 “보안여관 등불 밑에서 ‘문화유적 총람 1, 2, 3’의 원고를 마감했다”고 소회한 적이 있어요. 이 밖에도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보안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거예요. 이런 손님들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보안여관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송고은 큐레이터는 “보안여관이라는 장소가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 이야기가 표백된 시공간이 아닌 명백히 남겨진 흔적 위에서 출발한 곳이기 때문에 오늘의 프로젝트가 가능했다”고 설명하며, “근대 경성에서부터 현재 서울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예술가들의 고민과 미래를 아트플랫폼으로 거듭난 문화숙박업소 보안여관이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끌고 가야 할지 진지한 담론을 펼칠 시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2004년 여관 폐업 후 2007년부터 문화예술기관으로 변신한 보안여관이 지난 11년 동안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사라진 풍경’과 ‘기록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전시 중 하나인 ‘내일 없는 내일’에서는 보안여관이 꾸준히 추구해온 주제들로 7인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는데요.


송고은 큐레이터는 “지난 11년 동안 전시 서문들의 데이터를 뽑아보니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단어가 도시, 풍경, 기억, 여관, 통의동이란 다섯 개의 단어였어요. 보안여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빙 전시와 더불어 ‘내일 없는 내일’ 전시는 이 다섯 개의 단어에서 출발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라지는 풍경과 기억의 아카이빙’에 대한 비평적 모색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루고자 했다고 합니다.

여관 70년, 미술관 11년

출처: http://www.boan1942.com/boan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은 백현주 작가의 ‘남겨지는 것의 권리’예요. 전시장 1층 윈도우 공간에 설치된 다섯 개의 영상은 기억과 흔적이 새로운 소비재로 기록되는 방식을 옛 보안여관 앞에서 벌인 퍼포먼스 기록 영상과 함께 배치한 것인데요. 보안여관을 일컬어 근대문학의 발상지라고 치켜세우며 서촌을 꾸미는 다양한 말을 내레이터모델의 입을 통해 읽게 하면서 진행한 퍼포먼스는 어딘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자기 성찰적인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보안여관과 작업을 해온 여다함 작가의 ‘객지 여덟 밤’은 보안여관이 미술관으로 변신하기 전 객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맞이한 숙소였던 과거 보안여관으로 회귀합니다. 사진과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형태로 객지에서의 낯선 밤을 재현해낸 것인데요. 통의동 보안여관의 아모르 파티는 전시는 비록 끝이 나더라도, 아모르 파티를 통해 기억하려고 한 보안여관은 계속됩니다. 


관람객들은 보안여관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과거의 예술은 기억하고, 그 다음 오늘의 예술을 보기 때문이에요. 70년의 일반 숙박업에서 11년의 문화숙박업소로 변신해 생활밀착형 예술을 지향하는 문화생산 플랫폼으로 거듭난 ‘통의동 보안여관’의 아모르 파티 11주년 기획 프로젝트는 ‘예술은 지금부터’라고 말하는 신나는 후렴구 같은 전시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세월을 입고 있는 듯한 보안여관은 공간 그 자체만으로 서울의 역사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여관으로 지내온 시간만큼 생활 속 예술과 만나는 플랫폼, 미술관으로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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