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사진작가가 기록한 DMZ의 순간들
비무장지대(DMZ)는 그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 자연생태가 잘 보전되고 전쟁의 흔적 또한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에요. 이러한 DMZ를 기록하기 위해 군사분계선까지 넘나들면서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있어요.
2년간 DMZ의 사계절을 작품으로 담고 다시 3년간 경의선 철도 복원사업현장을 기록했던 'DMZ 사진작가' 최병관 씨를 만나봤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사진.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도 가슴 한편을 시큰거리게 하는데요. 전쟁과 평화가 주는 역설을 앵글에 담은 사람, 사진작가 최병관 씨입니다.
최 작가는 30개의 주제를 카메라에 담고 있어요. 비무장지대(DMZ)는 그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DMZ 사진작가’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어요.
민간인 최초로 한강 하구 말도부터 동쪽 해금강까지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155마일(약 245km)을 왕복하며 수차례 사진을 찍은 이력 탓이에요.
아직까지도 민간인 통제구역 너머 군사분계선(MDL)을 기점으로 다닌 사진작가로 손에 꼽히는데요. 경기 파주 임진각과 판문점 사이의 ‘자유의 다리’는 현재 경의선 철로가 놓여 국군·유엔군 포로가 건너던 예전 모습은 그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선의 경계에서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르다
그가 DMZ를 처음 밟은 건 1997년 2월이에요. 육군본부가 DMZ 기록 차원에서 사진을 남기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최 작가가 그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2년간 GP에서 장병들과 생활하며 DMZ의 사시사철을 담은 주인공이 되었어요.
말로만 듣던 금단의 땅, 막상 발을 들이자 막막했는데요. 뭘 찍어야 하나. 지금까지 DMZ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없을뿐더러 동행하는 군인들도 어디로 인솔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휴전선 일대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어요. 남북의 총부리에는 항상 실탄이 장전돼 있었습니다. 보초 서는 북한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어요. 탄피를 발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는데요. 지프차로 갈 수 없는 곳이 많아 걷는 건 예사였지만 최 작가는 사람도 길도 없는 산등성이를 헤치며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어요. 1997년 말 닥친 외환위기였어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온 국민이 힘을 모으는 상황. 위기는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DMZ 사진 작업이 예산 부족으로 위기에 빠졌어요. 당장 필름 값도 충당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요. 하루에 사용하는 필름이 20롤이니 한 달이면 수백만 원이 필요했어요. 사진 작업은 이미 6개월 이상 진행됐던 터였습니다.
힘들게 시작한 작업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그는 어머니께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시골 땅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주었어요.
개인이 이렇게 나오니 육군본부는 도리어 협조의 뜻을 밝혔어요. 사진 작업을 지속하고 저작권 일체를 최 작가에게 위임하기로 했습니다.
한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사선의 경계는 수도 없이 닥쳤어요. 눈이 오면 1~2m씩 쌓여 방향을 잃기 일쑤였어요. 여차하면 지뢰밭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철책선 절벽에서 바람이 불 때면 온몸이 휘청했는데요. 가방이 떨어져 카메라가 망가지는 일도 있었다고 해요. 좀 더 생생한 모습을 담고 싶은 욕심은 그를 북쪽으로 이끌었고 안전을 우려하는 군 관계자들은 남쪽으로 잡아당기며 의견차가 수시로 발생했습니다. 그는 군에 유서를 내밀었어요.
죽음까지 각오한 상황, 그렇지만 하루하루 사진을 찍을수록 이게 아니었어요. DMZ는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남북 군인의 긴장감과 전쟁의 비극에 초점을 맞췄지만 셔터를 누를수록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평화와 생명. 분단의 현장에 오히려 평화가 숨 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산양이 열여덟 마리나 한꺼번에 나타났어요.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알려진 산양을 여기서 마주하다니. 누구의 괴롭힘도 없었는지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멸종 위기 생명체들은 개체수를 늘리고 있었어요. 사진이 공개되고 생태학자들은 DMZ를 주목했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맞닿은 곳곳에 우리의 이야기가 얽혀 있었어요. 옛 집터에는 아궁이 불 때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이불 보따리와 찢어진 고무신, 널브러진 가재도구는 급박한 피란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3개월 동안 오간 적도 있어요. 최 작가는 완벽한 색과 장면을 허락할 때까지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습니다.
결국 검게 녹슨 철조망에 눈이 내려앉으면서 장관을 이뤘는데요. 철조망은 하얀 눈꽃을 피어 파란 하늘과 마주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간 중간 냉혹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했어요.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2년간 찍은 사진이 10만 장. 그는 DMZ 평화를 알린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DMZ를 찾았어요. 6·15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면서입니다. 공사가 시작된 2000년부터 3년간 철도 도로복원 현장의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어요. 그의 사진은 사료 역할도 톡톡히 했어요. 남북한의 다른 건설 공법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반세기 넘게 굳게 닫혀 있던 철책이 무너지고 길이 생기던 순간, 그때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당시 경의선 복원공사가 마무리되며 열차 운행이 가능해졌지만 실제 열차는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최근 남북은 철도복원 공동조사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서부전선 ‘죽음의 계곡’이 ‘희망의 계곡’ 되다
최병관 작가는 DMZ의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사진에 담으며 전시만 마흔두 차례 가졌어요. 국내 전시는 물론 일본, 미국 등에서도 DMZ 풍경을 공개했는데요.
2010년 7월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유엔본부에서 사진전을 열기도 했어요. 세계는 그가 전하는 평화의 가치에 주목했어요.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어의 경계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DMZ는 생태·평화안보 관광지구로 개발하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어요. DMZ 내 GP가 철수하고 작은 변화를 이뤄가면서 대립의 공간이 평화의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단 개발을 최소화하면서 보존에 방점을 둬야 진정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최 작가의 생각이에요.
최병관 작가가 사진가로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어요. 일체의 색보정·트리밍·인공조명·보조기구 등을 배제하는 것. 오직 마음으로 보고 셔터를 누르는 게 그의 사진관이에요. 그 마음은 사진을 관통했고 보는 이의 공감을 샀는데요. 기교 없이 촬영으로만 존재를 증명한 셈이에요.
그는 이제 휴전선 155마일을 수차례 다니며 담은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남북의 마음을 녹이고 괴리감을 줄이는 기제로 작용하길 바랄 뿐입니다.
현재 남북관계가 평화적으로 진전되어 DMZ 내 GP(감시초소) 철수도 진행하고 있어요. DMZ지역은 그동안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아 보전될 수 있었던 자연생태와 전쟁의 흔적들이 잘 보존돼 있는데요.
남북관계가 더 발전되고 더 나아가 DMZ지역에 민간인이 방문할 수 있게 되더라도 최병관 씨 바람처럼 이 지역이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