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리호>의 선장, 김태리의 선과 악
선과 악, 동화와 소설, 소년과 소녀,
아침과 밤, 과거와 미래, 아이와 어른…
그리하여 완성된
김태리의 진실 혹은 대담.
동굴 같은 드레스에서 빠져나온 김태리는 블랙 수트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우리는 스튜디오 구석 칸막이 뒤편에서 마주 앉았다. 소파에 털썩 앉아 잠시 숨을 고른 김태리는 생수를 따서 꿀꺽꿀꺽 마신 뒤 촬영하는 동안 식어버린 페퍼로니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햄과 치즈의 윤기는 진작에 사라졌고 도우는 사막처럼 건조하게 굳어버렸지만 김태리는 <리틀 포레스트>의 갓 튀겨낸 아카시아꽃튀김을 대하듯 대단히 경제적이고 간결한 동작으로 세 조각을 내리 먹어치웠다. 혜원이 그랬듯 허기를 달래고 자신의 ‘작은 숲’을 찾은 김태리가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그렇다. 우리는 영화 <아가씨> 개봉 전 <보그> 촬영장에서 만난 적 있다. ‘1,500 대 1 경쟁률을 뚫고 박찬욱 감독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괴물 신인’이라는 정보 외에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처럼 마주 앉아 인터뷰를 했다. 신상을 탈탈 털 기세로 질문을 던졌지만 김태리가 가장 많이 들려준 대답은 “모르겠어요”였다. 즉각적 대답은 아니었다. 질문에 가만히, 곰곰이 생각하다가 모르겠다고 했다. 당황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 당시 기억을 들려주자 김태리는 번개를 맞은 듯 껄껄껄껄 웃었다. “그랬을 거예요. 그랬을 거예요. 시야가 경주마처럼 가려져 있어서 주변을 잘 못 봤거든요.”
나는 ‘모르겠습니다’의 정체를 그녀가 선택하는 작품과,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과, 간혹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보며 몇 년에 걸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이후 김태리가 선택한 첫 작품은 <리틀 포레스트>였다. 사계절을 담기 위해 꼬박 1년간 촬영한 영화에서 자연을 재료 삼아 밥을 지어 먹고 육체로 노동하며 고단한 청춘의 얼굴을 맑게 비워냈다.
그다음 영화는 6·10 민주 항쟁을 바탕으로 한 <1987>이었다. 한국 영화를 견인하는 빼곡한 남자 배우들 사이 단순한 홍일점으로 보여 기대가 크지 않았으나 막상 영화를 보니 주인공은 김태리였다.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보통 사람, 유일하게 변화하는 사람. 관객은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의 호흡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로맨스 드라마의 장인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김태리는 달랐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총포를 겨눴고, 남자에게는 헌신이 아닌 사랑을 줬다. 한국의 감독과 작가들이 이 총명한 배우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주는 필모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의 쓰임새를 탐구한 건 김태리 본인처럼 보였다.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엄청난 주목을 받았을 때 배우들이 선택하는 전형적인 행보와는 달랐다. 나는 ‘신인다운 풋풋함’이 배우의 세계에서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음을 느꼈다. 연극 무대에서 경력을 쌓아 처음부터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김태리 같은 배우만이 데뷔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움직이는 배우의 등장이었다. ‘모르겠습니다’는 오히려 멈추지 않는 사유의 표현이었다.
김태리의 차기작은 영화 <승리호>다. (2020년 여름 손꼽히는 기대작이었으나 하반기에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판타지를 솜씨 좋게 풀어낸 조성희 감독이 창조한 2092년 이야기다. 무려 한국 최초의 우주 SF영화다.
김태리는 선장 역을 맡았다. 잠깐, 한국 영화에서 선장 역을 맡은 배우가 있었던가.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 <해무> 속 선장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승리호> 장 선장은 그런 비릿한 욕망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올백 단발머리에 ‘라이방’ 보잉 선글라스를 쓴 채 레이저 건을 발사하며 우주를 누빈다. 마녀 혹은 ‘이 구역 미친년’으로 불린다.
선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멋있다는 말에 김태리는 몸을 일으키더니 “고맙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장 선장이 얼마나 멋진지 들려주었다. “선장님은 선내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에요. 선장님은 방아쇠예요. 선원들이 우왕좌왕 ‘장전해’, ‘조준해’ 하고 있으면, ‘너희 다 비켜’ 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인물이죠.”
다만 스타일링은 어색했던 모양이다. “선글라스… 저는 끝까지 어색했어요. (웃음) 적응이 좀 오래 걸렸나 봐요. ‘나는 괜찮다’ 세뇌하면서 했죠.”
선장이라는 캐릭터에서 연상되는 리더십과 실제 김태리는 지구에서 달나라만큼 떨어져 있다. “저는 눈에 안 띄는 귀퉁이에서 혼자 즐기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조성희 감독은 <보그>에 “김태리 배우가 아닌 다른 선장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김태리는 설명을 이어갔다. “선장님이 팀원들을 이끌기보단 각자 자기 몫이 있어요. 자기 방이 있고 각자 할 일이 있어요. 서로 죽일 듯이 싸워도 마지막에는 ‘저런 데선 믿을 만해. 저건 믿을 구석이 있어’ 하며 선장님에 대해 신뢰를 드러내요. 선배들과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가족이었어요. 승리호 안에서 가족적인 모습이 어떻게 배어 나올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승리호>의 배경 2092년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김태리도 유토피아를 상상한 적은 없다고 했다. “어릴 때 막연하게 미래를 생각하면 무서웠어요. 광활한 우주 속에 먼지 같은 존재가 나중에는 다 없어지겠지 싶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미래에는 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적인 질문을 더 많이 던져야 할 듯싶어요.”
승리호는 돈 되는 우주 쓰레기를 찾아 항해하는 우주 청소선이다. “지구가 아닌 우주로 생활 터전이 확장됐을 때 인간이 밖에 나가서 사니까 쓰레기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청소부가 필요하고, 쓰레기의 무게나 재질에 따라 돈을 받으니까 더 좋은 쓰레기를 얻기 위해 청소부들끼리 싸우고 점점 과격해지죠. 그런 상상이 재미있었어요.” 비록 우주 청소부가 어릴 적 우리가 상상하던 미래 유망 직업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SF영화 하면 번쩍번쩍 광나는 수트 입고 멋진 우주선 타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저희는 인간들이 지지고 볶아요. 그런 점도 재미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