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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된 오사마 빈라덴 아들이 전한 ‘테러리스트 아들’의 삶

오마르 빈라덴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예술가로서의 삶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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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의 넷째 아들 오마르 빈라덴

2001년 9·11 테러를 주도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의 넷째 아들 오마르 빈라덴은 우울할 때면 미국 서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1992)를 감상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폭력이 난무하던 옛 서부에서 농부로 조용히 지내는 한 노인을 또다시 복수극으로 끌어들이는 내용의 서부 활극이다. 


오마르는 영화를 안 볼 때면 보통 그림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대부분 풍경화다.


오마르는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 봐도 아버지의 강렬한 코와 검은 눈을 물려받았다. 그는 최근 화가로 활동한다. 그렇다면 예술적 재능도 아버지에게 받았을까. 그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오마르는 VICE와 인터뷰에서 “외가에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분들이 몇몇 있다”며 “어머니와 여동생, 외삼촌이 그림을 그리고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술적 열정은 유전”이라고 전했다.

'애리조나 데저트(ARIZONA DESERT)'


9·11 테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마르는 지난 1년간 작품 수십 점을 완성했다. 모두 표현주의적이다. 평면적인 그림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입혔다. 한 작품에서는 9·11 테러 이후 아버지의 은신처였던 토라보라의 협곡을 묘사했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산을 칠했고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봉우리를 진하게 표현했다. 오마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아버지가 은신한 산봉우리에서 약 1만2000km 떨어진 애리조나의 사막을 묘사한 그림이다. 별들이 박힌 하늘 아래 있는 시골집과 선인장을 그렸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아이 같은 단순함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 놀랍지 않은 일이다. 오마르는 모든 폭력과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림이 그에겐 어린 시절의 평온함을 찾아주는 도구 같았다.


오마르는 “너무 어리고 순수해서 주변 상황을 몰랐던 즐거웠던 그 시절이 그립다”며 “광대한 사막의 모래언덕과 구불거리는 바다, 어린 시절의 평화가 그립다”고 고백했다. 여기서 ‘광대한 사막의 모래언덕과 구불거리는 바다가 있던 도시’는 그가 어린 시절에 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제다이를 가리킨다.


그는 이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집과 가족농장을 오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농장에서 말과 염소, 가젤이 커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림을 향한 열망을 품었다. 7살쯤부터 아버지가 기르던 말을 그렸다. 학창 시절에 교실 벽에 자신의 그림을 걸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순간이 그가 회상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평온했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사우디를 이라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농장을 군사 기지로 전환했다. 이 모든 일은 2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빈라덴 가족은 이후 3년간 사우디와 사이가 틀어져 결국 수단으로 이주했다.


오마르에게 아버지 오사마는?

이때는 오마르가 사춘기를 겪던 때였다. 사춘기에 지정학적 갈등의 포화가 맞물렸다. 10대 초반엔 아버지를 따라 수단을 돌아다녔다. 10대 후반엔 아버지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의 계곡과 기슭, 전쟁터를 다녔다. 15세 땐 서방과 전투를 치르려는 알카에다를 따라 토라보라 근처에서 지냈다. 16세 땐 아프간 내전 최전선에 끌려갔다.


오마르는 아버지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엄격한 가장이었다. 자식들의 장난감을 빼앗고 주기적으로 때렸다. 또 자살 임무에 자원하라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군대는 아이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을 대상으로 치명적인 독가스 실험을 했다. 오마르와 형제자매들이 천식 증상을 호소하면 벌집이나 양파를 빨아먹으라고 했다. 


오마르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기 시작한 건 혼란스러웠던 청소년기였다. 전환점은 그가 내전 중에 아프간의 산길에서 저격수의 총격으로 꼼짝 못 하게 된 때였다. 그는 저격수의 총알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을 때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또 아프간 반군조직 탈레반과 북부 동맹이 영토 분쟁을 겪으며 발생한 혼란을 목격했다. 병사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 총기를 겨누어 공격했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한 아군은 그를 혼란스러운 분쟁 지역에서 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총을 겨눴을 거라고 무전기를 통해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마르는 18세 때 알카에다 임무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시리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2001년 아프간에서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다. 20세가 되던 해엔 사우디로 돌아갔다. 이 무렵 납치된 여객기 두 대가 미국 뉴욕 중심의 세계무역센터를 연달아 들이박았다. 아버지는 9·11 테러 직후에 토라보라 동굴에 있는 자신의 군사 기지로 몸을 숨겼다. 이곳은 20년 후에 오마르가 피처럼 붉은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에 옮겨 놓은 곳이다.


아랍인이라고 모두 테러리스트 아냐

현재 39세인 오마르는 지난 20년간 무고한 시민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의 주범 알카에다와 아버지를 규탄했다. 비록 성을 바꾸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잔학무도한 이념을 부정했다. 또 사건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마르는 2008년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많은 이들이 아랍인과 빈라덴 가문, 오사마의 아들이 모두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한다”며 “이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 대사’가 되고 싶어한다. 아버지의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가 벌인 사건의 그림자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마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양극성 장애, 성장기 트라우마와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피에 젖은 유산을 없애진 못했지만 내면의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았다.


내면의 평화에서 그림의 비중이 작지 않다. 오마르는 “세상 사람들이 내가 그동안 성장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며 “살면서 처음으로 평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며 지나간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며 “지난 일을 잊을 수 없다면 용서해야 마음의 평안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마르는 현재 영국 해협에 둘러싸인 프랑스 서북부의 작은 마을 노르망디에서 아내와 말을 키우면서 산다.

그는 아내와 말,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부인도 그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2006년 남편을 만났을 때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포토샵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은 여느 커플처럼 생계를 꾸려가기 바빠서 좋아하는 그림과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부인은 코로나19로 프랑스에서 이동이 어려워지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또 남편에게도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했다.


오마르는 “제한 조치로 미술용품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샅샅이 찾아 모두 구했다”며 “그날부터 작업실에 앉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테러리스트 아들’ 오마르에게 그림이란?

오마르는 주로 주변에서 영감을 받는다. 부인과 친구, 말, 집 주변을 흐르는 강. 이런 걸 볼 때 느껴지는 마음의 평화. 오마르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연에 고마움을 느끼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와는 반대인 작품도 있다.


그에게 일부 작품에서 드러나는 우울감은 무엇이고 그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오마르는 “어릴 때부터 타인의 슬픔과 고통, 전쟁으로 인한 절망과 고독을 봐야 했다”며 “폭력이 만들어내는 아픔을 느끼고 목격했다”고 답했다.


오마르가 그림을 통해 얻는 건 두 가지다. 그림은 사우디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프랑스에서의 삶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 동시에 모든 트라우마와 싸우는 과정이었다. 특히 트라우마를 대면할 때 그의 그림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미국 서부였다. 아버지에게 가장 악감정이 높은 나라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해소했다.


오마르는 지금껏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다. 또 그가 지니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는 미국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문명’이라고 했던 아버지에 의해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게 다가 아니다. 오마르의 그림을 보고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영향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프간에서 10대 때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며 들었던 컨트리 음악, 서양 음악과 할리우드 영화 속 미국의 모습이 보였다.


오마르는 “옛 서부 영화를 좋아한다”며 “카우보이의 자긍심을 사랑한다”고 설명했다.


카우보이 신화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것이다. 하지만 오마르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던 ‘고귀한 변절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떠오르는 일이 많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가장 좋은 예시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신화로 불렸던 이야기를 뒤집어 폭력성을 다시 한번 성찰해본다. 폭력과 전쟁으로 얻은 영광을 부정한다.


영화평론가 브라이언 에거트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줄거리는 서구 영화의 전형적인 비유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반영한다”며 “강인한 총잡이가 (고전과 달리) 겁쟁이, 약자, 거짓말쟁이로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아 성찰하는 주인공은 폭력에 저항하며, 서양의 영웅이 꼭 ‘좋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암시한다”고 덧붙였다.


오마르가 오사마의 아들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과거는 과거이며,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그림이 내면의 평화를 얻도록 돕고 ‘상상의 세계’로 가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림은 그에게 어린 시절과 미국 평원의 꿈으로 탈출하는 수단이자 치유였다.


“그림이 삶에 빛을 다시 비춰주길”

그는 작품 ‘더 라이트’(빛)에서 도로를 그렸다. 검게 탄 듯이 시커먼 도로는 밝은 빛이 쏟아지는 지평선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도로가 끝나는 중간 지평선으로 눈을 옮기면 언덕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빛이 나온다. 아마 이건 그의 작품 중 가장 어두울 거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나도) 어두운 길 끝에서 빛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며 “그림이 내 삶에 다시 빛을 비춰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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