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꾸밀 자유' 찾아 탈북한 여성이 말하는 북한의 미용 문화

조회수 2021. 6. 7. 18:19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북한 출신 뷰티 컨설턴트는 남북의 미의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다.

북한 출신 뷰티 컨설턴트는 남북의 미의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다.

탈북민 뷰티·이미지 컨설턴트 윤미소씨는 고객의 특성을 분석해 어울리는 패션이나 메이크업을 지도해준다. 모든 사진: 윤형

스무 살, 평생 살던 조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흔히 생각하듯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가족들이 타국에 살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자유,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가꿀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런 자유가 윤미소씨(31)에게는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11년 전 탈북해 한국에 온 미소씨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옷과 화장을 좋아했다. 그의 고향인 양강도 혜산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해 밀수품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다. 미소씨의 어머니는 당시 흔했던 곱슬머리 파마 대신에 중국에서 유행하는 굵은 웨이브 머리를 하고 옷감을 떼와서 생활비를 벌던 소위 ‘잘 나가는’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미소씨도 미용과 패션, 외모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그는 현재 한국에 정착해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한다. 자신의 흥미와 특기를 살려서 직업을 선택했다. 고객의 특성을 분석해 잘 어울리는 패션이나 메이크업, 스타일을 지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VICE는 최근 경기 김포시 미소씨의 작업실에서 그와 북한의 미용과 패션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VICE: 탈북을 결심한 계기가 뭔가요?
윤미소: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어요. 그때 노란색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옷 색깔이 너무 튀고 영문이 적혀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알파벳도 기억나는데 ‘Sports’였어요. 2006년쯤에 ‘규찰대’라는 단속반이 색깔이 화려하거나 영문이 적힌 옷을 심하게 단속했어요. 원래 머리가 노란 편인데 색깔이 왜 그러냐고 지적당한 날도 있어요.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고 북한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을 옹호하는 청년단체 ‘청년동맹’에 불려가기도 했어요. 하루는 규찰대가 청년동맹에 가자고 붙잡았는데 도망쳤어요. 뛰어가다가 동네에서 한 언니를 만났어요. 돈을 받고 탈북을 도와주는 브로커였어요. 그때 딱 결심했어요. 떠나야겠다고. 먹고 사는 어려움보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고난이 더 힘들었어요.

“먹고 사는 어려움보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고난이 더 힘들었어요.”

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형편이 어려워졌거든요. 두 살 때 어머니가 이혼하셨고 10살이 되던 해에 새아빠가 집에 들어왔어요. 새아빠는 물욕도 많고 여자를 밝혀서 어머니와 자주 다퉜죠. 그러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어머니를 죽였어요. 돈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살인 사건이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가 됐어요. 새아빠의 출신 성분이 좋았거든요. 13살밖에 안 됐지만 너무 억울했어요. 나라에 크게 실망했죠.

‘이미지 컨설턴트’는 어떤 일인가요?
요즘은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해졌잖아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자기 관리를 많이 해요. 이런 고객을 위해 어울리는 색깔이나 화장법을 찾아주는 일을 해요. 외적인 이미지를 전반적으로 관리해주는 거죠.

북한에선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어요. 미용 분야 자체를 몰랐죠. 자신을 가꾸는 것도 마음대로 못 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도 화장이나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메이크업을 배운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한국에 와서 2015년부터 대학에서 ‘뷰티스킨케어’를 공부했어요. 피부 미용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링, 네일아트를 배웠어요. 남들이 자신과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도록 돕고 예쁘고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니 보람찼어요. 그때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 싶었죠.

“남들이 자신과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도록 돕고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보니 보람찼어요.”

북한과 한국의 미의 기준은 어떻게 다른가요?
북한과 한국의 미의 기준은 아주 달라요. 한국은 마른 체형에 브이(V)라인이거나 눈 큰 여성을 좋아하잖아요. 북한은 얼굴이 동그랗고 눈도 너무 크지 않은 여성을 선호해요. 너무 마른 체형이면 ‘힘이 없어 보인다’라든지 ‘일 못 할 것 같다’, ‘생활력이 없어 보인다’ 같은 소리를 듣죠. 남성도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다’고 얘기해요. ‘나무나 제대로 패겠냐’고 하죠. 피부도 하얀 것보단 구릿빛이 남자답다고 말해요.

그래도 북한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해요. 북한에서 다이어트하려고 설사약을 먹은 적도 있어요. 한창 외모에 관심 생기는 10대 중반에 언니들 따라 그랬어요. 몸매를 보정해주는 속옷을 입기도 했고요.

북한에서 가장 답답했던 건 무엇이었나요?
가장 답답한 건 옷이었어요. 북한의 옷 스타일은 한국의 노교수님이 입는 스타일이에요. 노출이 없어요. 또 정적인 스타일이에요. 색깔은 거의 고전적인 무채색이죠. 이 스타일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탈북민 뷰티·이미지 컨설턴트 윤미소씨의 작업실
탈북민 뷰티·이미지 컨설턴트 윤미소씨의 작업실

당시 북한에선 어떤 옷이 유행했나요?
지역마다 달라요. 북한은 타 지역에 가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해서 다른 지역의 유행은 잘 몰라요. 제가 살던 혜산에선 국경경비대가 입는 군복이 남자들 사이에서 ‘핫’했어요. 북한 말로 ‘맵짜다’고 하죠. 맵시 있다는 뜻이에요. 군복에서 견장만 떼면 사복이 되는 거죠. 똑같은 군복도 소재에 따라 급이 나뉘어요. 옷을 보면 출신 성분을 구분할 수 있어요. 소재는 나일론이 제일 좋고 그다음으론 면이 좋았어요.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가 북한의 패션 리더라는 말이 있어요.
북한에 있을 땐 리설주를 잘 몰랐어요. 근데 저 같아도 리설주 패션을 따라 했을 것 같아요. 남자들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따라 인민복을 입었어요. 나이 있으신 분들이 특히 좋아했어요.

2010년쯤에 유행했던 건 ‘항공 점퍼’였어요. 색깔별로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이 있었죠. 외상으로 사 입을 정도로 인기였어요. 항공 점퍼는 당시 3000~4000원이었어요. 쌀 1kg가 1000원이었는데 그 돈으로 하루를 산다고 보면 돼요. 바지 한 벌에 1800원쯤이니 항공 점퍼는 2배였던 셈이죠.

북한에도 서울 청담동이나 신사동 같은 패션 거리가 있나요?
혜산에 화려한 패션 거리는 없지만 ‘입을 줄 아는 애들’이 모이는 거리가 있어요. 사실상 조그마한 중고 장터였죠. 한중일의 옷을 밀수해 길바닥에서 파는 거예요. 좀 ‘심각한 옷’이다 싶으면 장마당(시장)에서 못 팔았어요. ‘심각한 옷’은 장마당에서 대놓고 팔기에 문제가 있는 옷이에요. 예컨대 나팔바지나 몸에 딱 달라붙는 옷, 영문이 적혀 있는 옷, 노출이 많은 옷 따위죠. ‘심각한 옷’은 가정집에서 몰래 팔았어요. “저 집에 옷이 왔대!”하고 소문이 퍼지면 패션에 관심 있고 친한 애들끼리 몰려서 그 집으로 가는 거예요. 이런 옷을 입고 싶으면 골목으로 몰래 다녀야 해요. 규찰대가 없는 곳에서 이런 옷을 입어요.

외모를 단속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어떤 제약이 있었나요?
‘부르주아 사상에 젖어 있다’거나 ‘왜미제 글이 적힌 옷을 입냐’고 하죠. 생활총화를 하라고 해요. 생활총화는 한 주를 반성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유하는 활동이에요. 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어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생활총화 노트에 학교생활 하면서 잘못했던 내용을 쭉 적어서 제출해요. 계속 쓰다가 쓸 게 더는 없으면 ‘공부를 열심히 못 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내용까지 적어요.

립스틱은 바르기가 쑥스러워 조심히 발랐어요. 북한에서는 립스틱을 ‘입 구’자에 ‘붉을 홍’자를 써서 ‘구홍’이라고 해요. 전에는 립스틱이 붉은색밖에 없었거든요. 북한 내에서 남들이 다 안 하는 짓이니까. 그냥 튀면 이상한 거예요. 북한에선 색조 화장도 이상한 거예요. 색조 화장을 하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거예요. 아니면 ‘눈두덩이를 왜 저렇게 퍼렇게 칠하고 다니냐’, ‘어디 맞았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탈북민 뷰티·이미지 컨설턴트 윤미소씨는 고객의 특성을 분석해 어울리는 패션이나 메이크업을 지도해준다.

그럼 북한에 있을 땐 화장을 어떻게 했나요?
북한에서도 아이라이너로 눈 윤곽을 그리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칠해요. 다른 색깔을 얹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이상한 일이었어요. 한국에선 색깔을 말할 때 웜톤, 쿨톤 여러 표현이 있잖아요. 북한에선 여자 피부색은 무조건 하얀 게 예쁜 거였어요. 북한에서는 스킨을 살결물이라고 부르는데 살결물도 썼어요.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제조한 ‘봄향기’가 유명했어요. 어머니는 북한 화장품보다 중국 화장품을 자주 쓰셨어요. 한국 화장품은 장마당 말고 개인이 판매하는 곳이 있었어요. 연줄을 통해 살 때가 많아요. 아는 사람한테 구입처를 물어보는 거죠. 안 친한 사이면 괜히 알려줬다가 걸릴 수 있어서 잘 안 알려줘요. 장마당에서 팔기도 하는데 숨겨두고 몰래 팔죠. 집에 있는 화장품도 친구들이 오면 숨겨야 해요.

어휴, 진짜 너무 답답하게 살았어요(웃음).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나오는 북한 모습과 실제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너무 시골 배경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렇게까지 옛날 분위기는 아니에요. 생활은 드라마와 진짜 비슷해요. 군인 집은 잘살고, 일반 집은 군인 집이 잘 사니까 부러워하고. 실제 군인 집 사모님은 동네 실세죠.

‘이미지 컨설턴트’로서 북한을 색깔에 비유해보면 어떤 색인가요?
흔히 빨간색이라고 하는데 북한은 빨간색과 거리가 멀어요. 빨간색은 열정과 욕구를 상징하잖아요. 북한은 원하는 것을 못 하게 하니까 빨간색은 아니에요. 검은색이라고 생각해요. 북한에 있을 때 자주 가던 터널이 있었어요. 거기 앉아 있으면 중국 지린성 창바이현(길림성 장백현)이란 곳이 보이죠.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동네라 한국 노래가 들렸어요. 답답하거나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자주 갔어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인지 북한의 색깔이라고 하면 터널의 컴컴한 색깔이 떠올라요.

“북한 하면 터널의 검은색이 떠올라요.”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지난해까지만 해도 북한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어요. 죄지은 사람처럼 숨겼어요. 옷 입을 때도 북한 여자처럼 보이진 않을까 시선을 의식했죠. 그러다가 해외의 단체나 국내 인권단체도 북한 주민의 인권에 관심을 두고 도우려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껏 자신을 숨기고 먹고사는 데에만 집중하면서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앞으로 당당하게 북한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탈북 여성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탈북 여성에게 이미지 컨설팅을 해주는 일도 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당당하게 북한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탈북 여성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BY 윤형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