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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퀴어퍼레이드에서 가장 기억 남는 순간 (feat. 한국 일본 홍콩)

조회수 2020. 7. 2. 12: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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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성소수자들이 대구와 도쿄, 홍콩에서 열린 퀴어퍼레이드를 회상했다.
출처: 서울퀴어문화축제 제공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이 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을 지나고 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이 문구는 한국 최대 퀴어퍼레이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과거 슬로건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 퀴어퍼레이드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다. 사랑은 국경과 인종, 성별 모든 경계를 초월한다는 것, 그 힘은 혐오를 지배한다는 것. 사랑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시대에 모습이 다르다고 사랑이 아닌 게 아니며, 누구나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다.

참가자들은 보통 매년 6월 각국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올해 6월은 여느 해와 상황이 다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이맘때 열리던 퀴어퍼레이드의 진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도 당초 6월 개최에서 8월 말에서 9월 말로 개최가 연기됐다.

VICE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성소수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퍼레이드의 정신을 되새기고 과거 퍼레이드에서 가장 즐겁고 소중했던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국

대구퀴어문화축제 : 첫 회부터 함께 한 무지개 깃발

출처: 대구퀴어문화축제 제공
풍물패가 2018년 6월 26일 제10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공연하고 있다.

배진교,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 겸 무지개인권연대 대표

Q.

2009년 제1회 '대구퀴어문화축제'부터 시작해 올해 12회까지 기획에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A.

아무래도 2009년 대구에서 처음 열린 축제가 가장 기억에 남죠.

그날 비가 왔는데 같이 비 맞으면서 행진했던 사람들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직도 축제마다 첫 행사 때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빌렸던 무지개 깃발 2개를 가보처럼 챙깁니다.

Q.

깃발에 얽힌 이야기가 있었나 봐요.

A.

당시 처음 축제 기획을 해서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더구나 예산도 부족했고 무지개 깃발도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라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봉사 갔을 때 한채연 당시 축제기획단장님께 깃발을 빌렸어요. 나중에 축제가 끝나고 돌려주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대구에서 처음 축제가 열린 기념으로 소장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6개인가를 빌려왔는데 퍼레이드에 매번 들고 나가면서 몇 개를 분실했어요. 남은 깃발 2개가 그래서 더 소중해요. 축제마다 항상 들고 나가고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중간에 항상 확인합니다.

깃발을 보면 첫 축제가 생생히 떠올라요.

Q.

첫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어땠나요?

A.

지금과 아주 달랐죠. 처음에는 '왜 굳이 서울이어야 하나, 대구에서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달려들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면서 난색을 보였어요. 축제를 경찰서에 처음 신고하러 갔을 때가 기억나요. 담당 경찰이 '퀴어'라는 단어를 잘 알아 듣지 못했어요. 말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때였죠. 첫 축제 때는 참가자 중에 퀴어 당사자가 10명 정도뿐이었어요. 다들 마스크 쓰고 사진 안 찍히려고 조심했죠.

축제 전에는 참가자들이 시민들과 충돌 없이 행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시민들이 행진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 같더군요. 풍물패가 행진을 도와줬는데 저희를 풍물패라고 착각하셨던 것 같아요. 첫 행진이 의미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성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만들어두면 분명 한두 명 씩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성소수자 인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요.

제4회 축제 때는 동성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때 취재 열기가 대단했죠. 그 후로 점점 당사자들이 축제에 참여하는 비율이 늘었습니다.

Q.

'대구퀴어문화축제'의 특색은 뭘까요?

A.

한 단어로 '열정'이죠. 대한민국 성소수자 인권의 현주소를 볼 수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구를 '보수의 성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축제 규모가 커지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거나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축제가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6회 때는 '성지를 지키자'며 기독교인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로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행렬을 방해하려고 했죠. 퍼레이드가 지나갈 길목을 막으면서 기도를 하더라고요. 집회 신고를 냈으니까 경찰이 이분들을 강제 연행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방향을 돌려 목적지까지 행진을 끝냈어요. 참가자들과 혐오 세력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축제라기보다 시위 같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열기로 가득했어요.

일본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 :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미소

두리안 롤로브리지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드래그 퀸

Q.

2017년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A.

사실 당일 늦잠을 잤어요. 전날 밤 야근하고 늦게 잤거든요. 원래는 그날 축제에서 공연하기로 돼 있었어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미 늦었더라고요. 그 당시엔 몸도 정신도 최악이었어요.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까지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우울한 한 해를 보내고 있었어요.

솔직히 '즐거운 프라이드'나 '행복한 게이 생활'은 저와 상관 없는 말이었어요.

그때 나갈 준비를 허둥지둥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차를 태워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차 뒷좌석에서 화장하면서 행사장에 갔죠. 당시 가족들은 제가 동성애자이고 드래그 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의 차 뒷좌석에서 드래그 퀸 분장을 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죠.

가는 길에 아버지는 평소 같이 차분한 어조로 어머니와 처음 만났던 얘기를 해주셨어요. "엄마가 옛날에 이 근처 살았어. 그래서 네 엄마를 보려고 이쪽으로 자주 왔지."⠀

행사장 근처에 도착한 후, 차에서 급하게 내려서 힐을 신고 퍼레이드 장소로 향했어요.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아버지가 절 계속 지켜보고 계시더라고요. 몇 번을 돌아봐도 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소를 지으시면서요.

Q.

아버지께 배웅 받으면서 어떤 기분을 느꼈나요?

A.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드래그 퀸 게이 아들'을 차로 바래다주며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무뚝뚝한 아버지가 저를 많이 아끼신다는 것을요.

그래서 2017년 퍼레이드는 마음을 녹여주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냈어요.

홍콩

홍콩 프라이드 퍼레이드 : 홍콩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프라이드 축제에서 느끼다

신상하,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기획지원처장

Q.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어느 나라 축제에 제일 먼저 가보고 싶으세요?

A.

홍콩이요. 지난해 열린 '홍콩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홍콩 민주화 운동과 맞물리면서 강렬한 광경을 연출했어요. 아직 안 가본 나라의 퀴어퍼레이드도 많지만 홍콩을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Q.

지난해 홍콩 프라이드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A.

당시 홍콩은 정부가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을 추진하면서 반대 시위로 뜨거웠어요. 그러다 보니 대규모 축제를 열기 위해 허가받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고 해요. 결국 지난해 축제는 행진 없이 진행됐습니다.

(퍼레이드가 시위로 변할 수 있다고 경계한) 경찰이 주최측의 행진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분위기가 다운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아무래도 퀴어퍼레이드에서는 행진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이 상당하니까요.

(참고: 퀴어퍼레이드는 51년 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스톤월 항쟁'을 기리기 위해 시작했다. '스톤월'이라는 술집에서 경찰과 성소수자가 크게 충돌한 사건을 계기로 행진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Q.

실제 축제 분위기는 어땠나요?

A.

행진은 없었지만 축제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축제 참가자들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송환법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도 전율을 느낄 만큼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누가 계획하지도 주도하지도 않았었거든요. 구호를 외치자는 합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축제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목소리 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귀국 전에 홍콩 축제 주최 측과 약속했어요. 다음 축제에서 꼭 다시 봤으면 좋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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