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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계 업계를 이끌어가는 세 그룹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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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포럼 작성일자2018.05.28. | 37,059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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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됩니다. 바로 거대 그룹의 등장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브랜드간의 연합은 존재했습니다. 스와치 그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SSIH나 ASUAG를 비롯해 ETA의 뿌리인 에보슈 SA(Ebauches SA)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 울타리 안에서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존을 위한 이해관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많은 브랜드가 그룹에 속해 있지만 고유한 역사와 유산에 초점을 맞춘 브랜딩과 포지셔닝을 토대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얼핏 봐서는 그룹의 입김이 크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룹은 소속 브랜드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럭스컨설턴트와 모건 스탠리가 발표한 2017년 스위스 시계 리테일 마켓 점유율 연구 자료. 출처 FHH

특별함을 평범함으로


현재 스위스 시계 업계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곳을 꼽으라면 스와치 그룹과 리치몬트 그룹 그리고 LVMH를 들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스와치 그룹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시계 왕국입니다. 베이직, 미들, 하이, 프레스티지 & 럭셔리까지 총 네 개의 세그먼트로 구성된 피라미드 구조는 왕국을 지탱하는 이념입니다.


스와치 그룹의 강점은 ETA라는 에보슈 메이커에 있습니다. 브레게, 블랑팡, 글라슈테 오리지날, 오메가와 같은 프레스티지 & 럭셔리를 제외한 나머지 브랜드는 ETA로부터 무브먼트를 공급받습니다. ETA 무브먼트의 성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안정성이 뛰어나고, 관리가 수월하죠. 하지만 몰개성적인 디자인과 투박한 마감, 희소성의 결여로 인해 오명 아닌 오명을 써야 했습니다. 그랬던 ETA는 최근 무브먼트의 성능을 끌어올렸습니다. 그것도 몇 단계나 말이죠. 

위 사진은 해밀턴의 칼리버 H-10입니다. 로터를 해밀턴의 로고와 이름으로 장식한 것 외에는 ETA2824-2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분들이라면 아마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레귤레이터의 부재입니다. 기존의 ETA의 무브먼트는 에타크론(ETACHRON) 시스템을 이용해 시계의 오차를 조정합니다. 밸런스 스프링을 편리하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이 무브먼트에서는 에타크론과 레귤레이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프리스프렁 밸런스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프리스프렁은 고급시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밸런스 스프링의 자유 운동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등시성 측면에서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도 있습니다. 파워리저브의 증가처럼 말이죠. 

티쏘 발라드 파워매틱 80 크로노미터

기존 ETA 무브먼트의 파워리저브는 48시간을 넘지 않았습니다. 주말에 시계를 착용하지 않는다면 월요일에는 시간을 다시 맞춰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ETA는 파워리저브를 80시간까지 늘렸습니다. 무브먼트의 진동수를 시간당 21,600vph로 낮추고, 기어 트레인의 에너지 전달 효율을 최적화하며, 더 긴 메인스프링으로 교체해 이룩한 성과입니다. ETA는 파워매틱 80이라고 명명한 이 무브먼트를 그룹 산하 브랜드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무브먼트의 수혜자는 티쏘, 해밀턴, 미도, 라도, 세르티나 같은 중저가 브랜드입니다. 모든 컬렉션에 탑재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각 브랜드의 생산량을 미루어 볼 때 결코 적지 않은 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도 바론첼리 칼리버 80 크로노미터. 밸런스 콕에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했음을 의미하는 Si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ETA 무브먼트의 변화는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 퍼즐은 실리콘입니다. 스와치 그룹은 율리스 나르당, 파텍 필립, 롤렉스와 함께 실리콘의 잠재성에 가장 먼저 주목했습니다. 실리콘 연구 개발의 기수인 CSEM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이들은 밸런스 스프링을 비롯한 실리콘 부품을 적극 채용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실리콘 도입에 조력한 이들이 브레게, 블랑팡, 오메가 같은 고급 브랜드라는 것입니다. 복잡한 공정과 높은 제조 비용 같은 장벽으로 인해 중저가 브랜드보다 생산량이 적은 이들에게 먼저 적용하는 것이 적합했을 겁니다. 그랬던 실리콘은 이제 왕국 내 대부분의 브랜드가 공유할 정도로 보편화됐습니다. 

물론 실리콘을 사용한 무브먼트가 무조건 고급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허나 실리콘이 가진 뛰어난 항자성과 내충격성은 분명 무브먼트의 성능을 높이는 요인입니다. 이 같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가격은 각 브랜드의 포지셔닝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스와치 그룹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무브먼트의 도약을 통해 스와치 그룹의 아성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다가가는 럭셔리


스와치 그룹과 함께 시계 시장을 양분하는 거대한 축은 리치몬트 그룹입니다. 방돔 럭셔리 그룹과 LMH를 인수합병하며 탄생한 리치몬트 그룹은 스와치 그룹과 달리 서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두가 고급시계를 지향하며 개성이 뚜렷합니다. 

©Olaf_Tamm_Hamburg_Germany for Richemont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시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고급시계 브랜드는 무한 경쟁에 나섰습니다. 더 아름답고 복잡한 시계를 마구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성장세가 꺾이면서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고급시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부호들은 이미 많은 시계를 경험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이들의 니즈를 따라잡는 건 여의치 않습니다. 지름 40mm 안팎의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계 수요가 줄어들자 재고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리치몬트 그룹은 2016년 아시아권 딜러에게서 재고를 도로 매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감원과 구조조정도 이어졌죠. 타격을 입은 리치몬트 그룹은 저변 확대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합니다. 

스트랩 교체가 가능한 까르띠에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파네라이 루미노르 베이스 로고 3 데이즈

뚜렷한 변화는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엔트리 컬렉션 강화입니다. 스포티한 성격을 가진 시계에 한해서 한정적으로 사용한 스테인리스스틸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소재에 변화를 주는 것이 가장 빠르기 때문입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피프티식스, 까르띠에의 산토스나 탱크, 파네라이의 루미노르 베이스, 예거 르쿨트르의 폴라리스 등 새롭게 선보인 컬렉션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양한 스트랩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인터체인저블 시스템도 놓쳐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사용자가 스트랩을 손쉽게 교체할 수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교체용 스트랩을 추가로 제공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리치몬트 그룹에 한정됐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럭셔리 브랜드가 어쩐지 겸손해진 듯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바쉐론 콘스탄틴 피프티 식스 데이-데이트 스테인리스스틸 버전

이 같은 전략에는 핵심 모델을 중심으로 기존 제품을 크게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모험 대신 검증 받은 혹은 대중적인 제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짐과 동시에 럭셔리 브랜드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혜택이 생긴 셈입니다. 랑에 운트 죄네나 로저드뷔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위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은 소비자에게는 반가운 소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브랜드 정체성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강력한 리더십


LVMH는 앞선 두 공룡에 비하면 덩치는 조금 작습니다. FHH 저널이 공개한 럭스컨설턴트와 모건 스탠리의 자료에 의하면 LVMH가 리테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9%로, 스와치 그룹이나 리치몬트 그룹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시계 전문 브랜드는 위블로, 제니스, 태그호이어가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스와치 그룹과 리치몬트 그룹이 최근 몇 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할 때 LVMH는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도 꽤 큰 폭으로 말이죠(2017년 LVMH의 시계 부문 매출은 2015년 대비 15%정도 성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2014년 3월 1일부터 시계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장 클로드 비버가 있습니다.


LVMH 시계 부문의 핵심 인물. (왼쪽부터)그룹 시계 부문 회장 겸 태그호이어 CEO 장 클로드 비버, 제니스 CEO 줄리앙 토나레, 태그호이어 제너럴 디렉터 기 시몬, 위블로 CEO 리카르도 과달루페

새로 부임한 회장은 그룹 내 브랜드 간 철저한 위계질서를 수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태그호이어에게는 엔트리 레벨을, 제니스에게는 미드레인지를, 위블로에게는 톱 티어를 맡기기로 했죠. 이를 위해서는 두 브랜드의 체질 개선이 선행돼야 했습니다. 그 둘은 태그호이어와 제니스였습니다. 태그호이어는 크로노그래프를 기반으로 한 컴플리케이션으로 기술력을 뽐냈지만 브랜드를 이끌어갈 주력 컬렉션은 답보상태였습니다. 제니스는 1969년에 출시한 엘 프리메로 이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과거에 머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줬습니다. 둘에게는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비버는 중구난방인 포트폴리오를 정리한 뒤 핵심 컬렉션에 힘을 싣기로 했습니다. 태그호이어는 까레라를 중심으로 아쿠아레이서와 링크를, 제니스는 엘 프리메로라는 이름을 뒤로 물리고 데피(Defy)를 꺼내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팬을 모두 아우르는 오타비아

시간당 진동수가 108,000vph(15Hz)에 달하는 고진동 시계 데피 랩

다음 단계는 브랜드의 뿌리를 들춰내는 일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유산을 간직한 두 브랜드는 사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태그호이어에게는 레이싱과 크로노그래프 DNA가, 제니스에게는 고진동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비버는 양가의 전통을 바탕으로 오타비아와 데피 랩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죠. 새로운 변화는 두 브랜드에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선사했습니다. 지향하는 바가 명확해지자 그룹 내 브랜드는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니스 데피 랩(Defy Lab)은 모나코 V4와 마이크로펜둘럼에스(MikroPendulumS)제작을 지휘한 태그호이어 제너럴 디렉터 기 시몬(Guy Sémon)의 아이디어에서 비롯했고, 위블로의 스마트 워치인 빅뱅 레프리(BigBang Referee)는 태그호이어의 커넥티드 워치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브장송(Besançon)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태그호이어의 호이어-02T에서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을 주름잡던 제니스의 과거가 떠오르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요?(제니스의 데피 랩 역시 브장송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습니다) 이제 LVMH는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LVMH의 삼형제가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앞으로 더욱 커질 것입니다. 비버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계속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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