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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다는 개발자 관두고, 아마존 매료시킨 한국 '육수'

조회수 2021. 4. 16. 13: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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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 만에 녹는 고체육수 '순간' 개발

프로그래머, 분식집 사장님에서 식품 창업가로 

식품연과 공동 개발, 아마존 통해 미국 수출


코로나19 사태로 간편식 시장이 급성장했다. 편리함만 강조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소비자들은 보다 신선하고 건강까지 생각한 간편식을 찾는다.  


델리스는 식재료 전문 스타트업이다. 물에 넣고 3초만 기다리면 멸치·새우·버섯 등을 넣고 푹 우려낸 육수가 되는 고체 육수 ‘순간’을 개발했다. 김 대표를 만나 창업 스토리를 들었다.


◇숨길 수 없었던 ’창업 DNA’

출처: 더비비드
김희곤 델리스 대표. 각설탕처럼 물에 녹아 3초 만에 진한 맛의 육수를 만들어내는 고체 육수 '순간'을 개발했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1999년 IT 개발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프로그래머로 8년을 일하다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2000년대만 해도 개발자는 ‘밑바닥 일을 한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공대생을 ‘공돌이’라고 하듯이요. 기업마다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사업을 기획하고 직접 프로젝트를 이끄는 일이 하고 싶어 직종을 바꿨습니다. 다른 IT 회사로 이직해 3년 동안 기획‧영업 일을 했어요.”


2010년 한국 IT 산업에 위기가 닥쳤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이 위세를 떨치면서 한국 IT 산업의 경쟁력이 위기를 맞았다는 있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왔다. 김 대표는 IT 분야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개인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떡볶이 프랜차이즈를 차렸다. “원래 요리가 취미였어요. 프로그래밍과 요리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프로그래밍이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라면, 요리는 여러 재료를 조합해 맛있는 음식을 탄생시키는 것이죠.”

출처: 델리스
고체 천연육수 '순간'.


6년간 성업했지만 풍납동이 문화재 보존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주변 상권이 죽었다. 어쩔 수 없이 떡볶이 장사를 접었다. 


이후 철도 분야 회사에 들어가 3년 간 사업 관리 업무를 했다. 수서고속철도(SRT), 카드 단말기 교체 사업 등에 참여했다. 적성에 맞았고 보람도 있었지만 '내 일'이 아니란 아쉬움이 있었다. “당시 제 일이 사장의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워보고 싶더군요.” 


몸 속에 내재된 ‘사업 DNA’를 인정해야만 했다. 다시 한번 창업에 나섰다. “식당을 운영할 때 가장 불편했던 게 ‘육수 끓이는 일’이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보관이 어렵다는 애로사항이 있었죠. 아내가 끓여서 냉장고에 보관해둔 육수가 상해서 다 버려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간편하면서도 맛 좋은 육수를 개발해 보기로 했어요.”


◇동결건조 고체 육수·채수 최초 개발

출처: 델리스
(왼쪽부터) 전시회장에서 김희곤 대표와 장수문 이사. 71년생 동갑내기 중학교 동창으로 두 사람 모두 IT 회사에서 일했다. 술 한잔 기울이며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얘기하다 창업에 나섰다.


2017년 고체 육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71년생 동갑내기 중학교 동창생이자 IT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장수문 이사가 함께했다. “국물 상태의 육수에서 물만 쏙 빼면 고체 덩어리가 남을텐데, 그 덩어리로 다시 육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액체보단 물기가 없는 고체가 쉽게 상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고요.” 온라인몰에서 판매중이다.


스타트업과 기업 연구소를 연결하고 시제품 제작을 지원하는 정부 사업에 선정됐다. 한국식품연구원(식품연)의 자문을 받아 ‘고체 육수’ 개발에 돌입했다. “마침 식품연에 저희와 비슷한 아이디어로 특허를 출원한 박사님이 계셨어요. 20년 넘게 조미료 연구만 하신 분이었죠. 곧장 연락했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출처: 더비비드
'순간'의 다섯 종류 제품. '채소' 제품은 채수를 만들 수 있어 비건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다.


고체 상태의 천연 조미료를 물에 녹이면 육수가 되는 원리를 박사로부터 알아냈다. “육수 원액을 영하 35~40도 초저온에서 얼렸다가 건조시키는 ‘동결건조 제조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건조 과정에서 수분이 빠져나간 곳에 작은 공기 구멍이 생기는데요. 물에 넣으면 이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 고체 상태 조미료가 녹게 되죠.”


원액을 얼리는 공정 역시 식품연에서 개발한 특허 기술(항고혈압 기능을 포함하는 천연조미료의 제조방법) 활용으로 해결했다. “염도가 높으면 원액이 쉽게 얼지 않아요. 무리해서 얼리면 터져버립니다. 박사님께 이전받은 기술을 활용해 염도가 낮은 조미료를 개발했어요. 이 과정이 가장 어렵고 오래 걸렸는데요. ‘동결건조’는 박사님께도 생소한 기술이라 시제품만 6번은 만든 것 같아요.”


◇아기 이유식에도 넣을 수 있는 육수

출처: 델리스
3초 만에 물에 녹는 '순간'. 조리 도중에 넣어도 덩어리가 남지 않고 녹는다.


시중의 어떤 제품보다 빠르게 녹는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타사 제품은 분말에 강한 압력을 가해 만든 형태가 대부분이에요. 물에 녹는 데 3분 이상 걸려서, 조리 도중 넣으면 잘 풀어지지 않아요. 된장찌개를 팔팔 끓이다가 간을 봤는데 싱거우면 조미료를 넣어야 하잖아요. 이때 타사 제품을 넣으면 덩어리째로 남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요리 중간에 넣어도 잘 풀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1년의 공동 연구 끝에 2019년 10월 완제품이 나왔다. 이름은  ‘순간’으로 지었다. 바로 녹는다는 뜻을 담았다. 재료 손질, 우려내기, 재료 건져내기, 냉동 보관 등 번거로운 과정을 모두 없앴다. 크라우드펀딩에선 1회만에 1500만원이 넘는 매출을 냈다. “종류는 멸치·소고기버섯·해물·치킨·채소 5가지예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산입니다. 염도는 0.2% 수준이어서 아기 이유식에도 활용할 수 있어요.” 온라인몰 등에서 판매중이다.


'순간'은 환경 보호에도 도움이 된다는 게 김 대표 설명이다. “개별적으로 육수를 끓이고 나면, 남은 재료는 음식물 쓰레기가 되죠. 순간을 쓰면 낭비 없이 딱 1회 분량의 육수를 얻을 수 있어요. ‘채수(채소를 삶아낸 물)’ 제품도 있으니 비건(채식주의자)도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죠.”


◇창업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

출처: 델리스
김희곤 대표. 대한민국 식품대전 등 다양한 전시회에서 '순간'에 대한 소비자 반응을 살펴 제품을 개선했다.


해외에서도 '순간'을 찾는다. 지난 1월 미국 아마존에 입점해 성공적인 판매를 시작했다. 스파게티 등 미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에 활용할 수 있는 치킨 육수가 인기다. 동남아시아, 캐나다, 멕시코 등 진출도 준비 중이다. 글로벌 직구 사이트 ‘큐텐’ 등 온라인몰을 활용할 생각이다.


사회를 생각하는 기업인이 되는 게 목표다. “농수산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경기 양평에 있는 생산 공장을 더 큰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데요. 공장 생산성이 높아져서 직원들의 수입이 높아지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요.”

출처: 델리스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


델리스는 자본금 단 300만원으로 시작했다. “요즘 창업에서 자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을 적극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제품 제작, 마케팅 비용 등을 지원 받을 수 있고, 투자자를 소개받을 수도 있어요. 시작도 못해보고 포기하기엔 아깝잖아요.”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도전하라는 얘긴 아니다. “창업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과 같아요. 호랑이 등에는 올라가기 쉽지 않고,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오기도 힘들죠. 이렇게 어려운 과정인데 철저히 준비하지 않고 도전한다면 실패는 불보듯 뻔할 겁니다.”


/백승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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