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 있는 청년 농부의 꿈

조회수 2019. 12. 18. 18: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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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함께 꿈을 일구는 젊은 농사꾼들을 만났다. 프리미엄 쌀 농사를 짓는 주식회사 일산쌀 네 청년의 꿈.
한국인은 밥심

이 말도 이제 옛말인가. 쌀 소비량은 매년 줄어 지난해 1인당 61킬로그램을 기록했다. 마트에서 파는 쌀 포장 단위도 작아진지 오래다. 반면, 프리미엄 쌀 브랜드는 줄지어 등장하고 있다. 하나같이 단일 품종, 소포장을 내세운다. 단일 품종 쌀이어야 밥이 고르게 돼 맛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젊은 취향의 1~2인 가구를 겨냥해 패키지도 예뻐졌다. 

감각적인 디자인의 알루미늄 캔으로 마켓컬리에서 인기몰이 중인 ‘촉촉한쌀’도 그중 하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젊은 농사꾼 넷이 의기투합해 만든 프리미엄 쌀이다. “벼 수확은 다 끝났는데, 상품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아파트 단지를 뒤로한 논에서 만난 젊은 농사꾼 이재광이 활짝 웃으며 말한다. 

일산 토박이인 이재광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전쟁통에 피난 와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고양에 정착했고, 아버지는 일산신도시 개발 통에 나라에서 땅을 수용할 때도 새 농지를 찾아 농사를 지었다. 한마디로 우직한 농부 가문의 후손인 셈. 그렇다고 일찍이 벼농사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릴 땐 친구들의 놀림에 농사짓는 아버지를 창피하게 여기기도 했다. 대학 시절 부모님 일을 도우려고 들판에 나가보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밖에 없었다. 

지금 농사에 뛰어들면 희망이 있겠다 싶었다. 맘먹은 김에 건축에서 농업으로 전공도 바꿨다. 그렇게 이재광은 23세에 3대에 걸친 가업을 이어받아 농부가 됐다. “무농약 친환경 농법으로 프리미엄 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정성은 들이되 힘은 덜 쓰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제가 그렇게 힘이 센 편은 아니거든요.” 처음엔 농사를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지을까를 궁리했다. 드론으로 비료를 뿌리는 ‘드론 농법’을 도입했다. 촬영용 드론으로 논 관리를 하니 훨씬 수월하고 자료도 차곡차곡 축적할 수 있었다. 합리적인 ‘데이터 농법’은 가성비도 좋았다.

2014년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직접 판매를 시작했다. 로컬 푸드 매장을 공략했지만, 쉽지 않았다. 청년들끼리 모이면 시너지가 날 것 같았다. 식품을 전공한 동생 이재익과 물류, 유통 출신 우성종이 합류했다. 농사를 배우고 싶다는 청년이 있으면 인턴으로 채용했다. 그렇게 청년들이 똘똘 뭉쳐 농업회사법인을 만들고 ‘주식회사 일산쌀’로 이름 지었다. 농사는 함께 짓고, 오프라인 매장 관리와 직거래는 우성종이, 온라인 홍보는 이재익이 담당 하는 식으로 각자의 특기를 살려 역할을 분담했다. 전체를 총괄하는 것은 이재광 대표의 일이다. 그렇게 같이 약 9만 9174제곱미터가 넘는 논을 일궜다. 그때부터 청년 농부들은 정성 들여 키우고 도정한 쌀을 어떻게 포장하고 유통할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쌀은 신선 제품이라 도정 후 48시간이 지나면 산패가 시작돼요. 그래서 쌀을 개봉하고 일주일만 지나도 맛이 확 떨어지는 거죠.” 개봉 전까지 산화를 막고 신선하게 유통하기 위해 소량, 밀폐, 진공 포장을 하기로 했다. 궁리 끝에 850그램의 쌀을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팔았더니 다른 브랜드 쌀과 영 차별화가 안됐다. 분유통 모양 캔 패키지를 개발해 직거래 장터에 선보이자,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관심이 판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땐 직거래 장터에서 쌀 한 통도 못 파는 경우가 태반이었어요. 윤이 자르르 흐르는 밥을 지어 시식을 해도 안 팔리는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먹을 수 있는 제품이 잘 팔리더라고요. 그래서 개발한 제품이 현미칩이에요.” 꼬박 1년을 들여 개발한 현미칩은 맛은 누룽지처럼 구수하면서도 식감은 과자처럼 바삭바삭하다.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마르쉐@같은 직거래 장터에 내놓으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입소문이 나서 올해 11월엔 홈쇼핑까지 진출했다. 

현미칩의 성공에 용기를 얻은 청년 농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프리미엄 쌀의 포장과 판로를 고민했다. ‘먹어보지 않고도 사고 싶은 쌀은 대체 어떤 쌀인가’ 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졌다. 2인 가구 기준으로 일주일 치 쌀 700그램을 담아 온라인으로 팔아보자고 전략을 세웠다. 가장 공을 들인 건 쌀 패키지다. 패키지 개발에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알루미늄 캔에 담긴 ‘촉촉한쌀(가와지 1호)’이 태어났다. 단일 품종인 가와지 1호로 만든 촉촉한쌀. 촉촉한쌀 캔을 맛보기용으로 사먹어보고, 입맛에 맞아 재구매할 땐 넉넉하게 살 수 있게 4킬로그램 포장도 준비했다. 촉촉한쌀(가와지 1호)이 마켓컬리에 입점하자 반응이 뜨거웠다. 무농약, 프리미엄 쌀로 남다른 브랜드를 만들어보겠다는 주식회사 일산쌀 청년 농부들의 노력이 식자재를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소비자의 니즈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가와지란 이름이 일본 쌀 품종처럼 들린다고 하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가와지는 대화동의 옛 이름이에요. 1991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에서 신도시 개발을 하던 중 5000년 된 볍씨 12톨이 출토됐어요. 그 명맥을 잇기 위해 일산에서 육성한 품종이 가와지 1 호예요.” 가와지 1호는 아밀로펙틴 함량을 높인 덕에 찹쌀과 멥쌀 중간 정도의 쫀쫀한 찰기를 느낄 수 있다. 쌀 알은 작은데 밥을 지을 때 불리지 않아도 입에 착 달라 붙는 차진 맛을 낸다. 식어도 굳지 않아 김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벼농사만 10년쯤 하다 보니 이제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회사를 더 키워서 농사를 배우고 싶은 청년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어요.“ 이 정도면 꿈을 이룬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재광은 또 다른 꿈을 말하며 눈을 반짝인다. “농사를 지으려면 지방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들에게 서울에서 가까운 일산에서도 농사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일 배울 기회를 주고 싶어요. 그러면 저같이 젊은 농사꾼이 더 늘어나지 않겠어요? 주식회사 일산쌀이 청년 농부를 인큐베이팅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요. 하하.” 환하게 웃음 짓는 이재광의 어깨 위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우지경(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전재호

에디터 여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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