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 년의 시간이 담긴, 카자흐스탄

조회수 2019. 11. 13. 08: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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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중앙아시아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차린 계곡Charyn Canyon이 있다.

만년설에서 만난 미소

알마티는 현대문명과 대자연이 공존하는 도시다. 파미르고원에서 중국 신장 자치구까지 뻗어 있는 톈산산맥은 알마티를 지날 때 유독 빛난다. 톈산의 줄기 중 하나인 알라타우산맥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자동차로 30여 분을 올랐을까. 눈앞에는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호수가 나타난다. 

해발 2511미터에 위치한 이 호수의 이름은 빅 알마티 레이크Big Almaty Lake, 8000여년 전 발생한 지진으로 형성됐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신비로운 옥빛 물색과 그 위로 솟아난 고봉들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황홀하다. 이다지도 깊은 산중에 호수가 있다니, 게다가 이렇게나 쉽게 닿을 수 있다니. 알마티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빅 알마티 레이크 입구로 돌아가 카자흐스탄 전통 매사냥 쇼를 본 후 알마티의 상징, 만년설을 만나러 심불라크Shymbulak로 향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빙상 경기장인 메데우를 지나면 심불라크로 오르는 곤돌라 탑승장이 나온다. 세 번의 환승을 거쳐 해발 3200미터에 위치한 탈가르 패스 Talgar Pass에 도착하자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심불라크의 웅장한 자태가 시선을 압도한다. 심불라크는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하다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천연 스키장으로 변신한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인 데다 경사가 가파르고 설질도 좋아 스키어들의 성지로 통한다. 

톈산의 광대한 산자락을 탐험할 수 있는 다양한 트레킹 코스도 있어 세계 각지의 모험가들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곤돌라를 타러 가는 길, 만년설을 배경 삼아 피크닉을 즐기는 할머니 세 분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 어린 여행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할머니 한 분이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한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찰나, 두 손에는 순식간에 절인 오이와 튀긴 빵, 초콜릿이 가득 쥐어졌다. “한국에서 왔소? 나도 조선 사람이오. 이리 와서 같이들 잡숴.” 별안간 들려온 한국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들의 얼굴이 우리와 꼭 닮았다. 카자흐스탄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떠나온 고려인의 또 다른 고향이다. 그들은 외딴 황무지에서 악착같이 삶을 개척했고 고려인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그들이 지나온 험난하고 고달픈 역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러나 그들과의 예기치 못한 짧은 만남 속에선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무한하게 끓어오른다. 케이블카의 문이 닫힐 때까지 잘 가라며 손을 흔들던 할머니들의 미소, 낯선 땅에 품었던 낯선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1200만 년의 시간이 담긴 계곡

알마티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중앙아시아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차린 계곡Charyn Canyon이 있다. 분주한 도시를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 풍경은 다른 나라로 떠나온 듯 삽시간에 뒤바뀐다. 현대적인 건물이 사라진 곳에는 광활한 초목 평야가 펼쳐지고 그 위를 달리는 말 떼의 행렬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계곡에 도착하기 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바이세이트Baiseit 마을에 잠시 정차하기로 했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형성된 이 조그마한 마을은 위구르족이 모여 사는 터전이다. 길가를 따라 쪼르르 놓인 낡은 좌판 위에는 과일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책가방을 멘 아이들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골목 사이를 뛰어다닌다. 허름하지만 세월의 운치가 짙게 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어느덧 식탁 위는 고기를 꼬치에 꽂아 훈연한 샤슬릭Shashlik, 위구르식 국수 요리 라그만 Lagman, 러시아식 만두인 펠메니Pelmeni 같은 음식으로 푸짐하게 차려진다. 배를 두둑하게 채운 후 다시 길 위로 오른다. 

비포장도로에 진입한지 약 30분이 지나자 황량한 대지 위로 목적지를 알리는 푯말이 나타난다. 차린 계곡은 위로 솟은 협곡이 아닌 땅 밑으로 꺼진 협곡이다. 1200만 년의 세월 동안 강물과 비바람이 대지를 이리저리 조각하며 거대 협곡을 생성했다. 계곡을 탐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대부분의 여행객은 협곡의 시작점부터 차린강까지 2킬로미터가량 이어지는 ‘성들의 계곡Valley of Castles’ 구간을 걷는다. 비탈길을 따라 협곡 바닥에 다다르니 거인처럼 솟은 붉은 기암괴석의 향연이 펼쳐진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된 사암 바위들, 척박한 땅 위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꽃피우는 희귀 동식물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에메랄드빛으로 세차게 흐르는 차린강이 나타난다. 알마티로 돌아가기 전 전망대에 들러 다시 한번 협곡을 눈에 담는다. 대지를 가르며 한없이 뻗어나가는 협곡이 마치 카자흐스탄의 거친 자연으로 향하는 문처럼 느껴진다. 미처 보지 못한 드넓은 사막과 광야 그리고 그 위를 바람처럼 떠돌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대한 나라, 그러나 이제는 낯설지 않은 땅 카자흐스탄을 꼭 다시 찾겠노라 다짐하며 이곳을 떠난다. 

글 ·사진 고아라(프리랜서)  

취재 협조 에어아스타나

에디터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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