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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만난 유럽 세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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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크, 네덜란드 로테르담, 독일 쾰른. 각기 다른 매력을 품은 도시들은 ‘조금만 더’ 머물기를 요구했지만 현실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유럽 곳곳을 이어주는 철도가 없었더라면, 유럽의 기차를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레일 패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였을 것이다. 

영국 런던의 킹스크로스역 입구. 수염이 풍성한 중년 사내가 한 젊은이에게 “What do you think of Brexit?”라고 물었다. 마침 내일이 영국의 EU 탈퇴 기한 연기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다(결국 EU와 영국은 브렉시트 기한을 오는 10월 31일까지로 재차 미루는 데 합의했다). 기차역 내 카페테리아에서 먹은, 그러니까 달걀프라이, 베이컨, 소시 지, 아보카도, 콩 등으로 구성된 아침 메뉴보다 브렉시트라는 신조어가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잠시 후 일등칸 10번 좌석에 앉았고, 기차는 오전 7시 30분 요크를 향해 출발했다. 이미 아침밥을 먹었는데도 기차에서 제공된 무료 식사가 생각보다 근사해서 또 먹었다. 브라운 토스트와 달걀 반숙, 요크셔 소시지 와 베이컨, 토마토와 버섯 등이 맞춤하게 구워졌고, 간도 잘 맞았다. 위장이 음식으로 가득 차오르는 동안 창밖 하늘에서는 푸른색의 지분이 커져갔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이 노란 들꽃과 협력해서 이뤄낸 색의 앙상블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속열차가 런던 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요크셔 지방(다리가 짧은 개 요크셔테리어와 가슴통이 굵고 몸통이 긴 돼지 요크셔의 고향이다)의 고도이자 지난 3월 <선데이 타임스>가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한 요크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이면 충분했다.

안과 밖이 딴판인 오래된 도시
요크

코가 유난히 크고 빨간 시티 투어 가이드 앨런 샤프를 앞세우고 도시 의 상징인 13세기 성벽에 올랐다. 성곽의 태생적 목적이 대부분 그렇듯 요크의 그것도 적을 방비하기 위해, 정확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쟁 속에서 세워졌다. 물론 오늘날 3.4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의 안팎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전쟁 의 광기나 참혹한 대립이 아니라 오래된 도시의 차분한 풍경이다. 성의 담장을 따라 거닐며 흩뿌린 시선 속에서 도시의 또 다른 상징인 요크 민스터가 도드라졌다. 영국 북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고딕 양식 성당으로 손꼽힌다. 275개 의 계단을 하나하나 거치면 탑의 정수리에 오를 수 있다지만 왠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굽어보는 방식이 이 유서 깊은 도시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자유 시간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성곽에는 부섬, 몽크, 웜게이트, 미클게이트 등 4개의 바가 존재한다. 여기서 ‘바’는 술집이 아니라 문을 뜻하고, ‘게이트’는 문이 아니라 길을 의미한다. 4개의 성문 가운데 몽크 바를 통해 내려와 섐블즈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세계적인 신드롬을 몰고 온 영화 <해리 포터>에 얼굴을 비춰,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는 공간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상점과 식당이 올망졸망 모여 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소와 돼지의 피와 내장으로 흥건한 푸줏간 골목이었다. 요크는 도심과 도심 바깥의 모습이 영 딴판이다. 차를 몰아 조금만 나가면 중세 도시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고 드넓은 들판과 광활한 구릉, 한적한 마을들이 곁을 내어준다. 동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노스 요크 무어스 국립공원은 살풍경한 느낌마저 준다. 거칠고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 언뜻 몽골의 초원, 스코틀랜드의 고산지대, 하와이 빅아일랜드의 화산지대가 겹 쳐 떠오른다. 국립공원이지만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숲의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어마어마한 바람이 사방에서 짓쳐들어온다. 그래도 끊임없이 풀을 뜯는 ‘양들의 침묵’이 목가적인 기운을 선사하고, 들꿩과의 희귀 새인 뇌조는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다. 


비록 한 마리밖에 영접하지 못했지만. 요크 외곽 투어의 또 다른 축은 캐슬 하워드가 담당한다. 하워드 가문이 성처럼 쌓아올린 대저택이다. 1954년부터 일반에 개방하고 있는데(해마다 25만여 명이 방문한다. 참고로 요크 인구는 약 20만 명) 평상시에는 120여 명, 성수기에는 200명 이상의 스태프가 근무할 할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이탈리아 회화를 중심으로 한 미술품 컬렉션 도 대단하다. 단순히 ‘물량 공세’와 ‘사이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 하워드 가문의 꼼꼼함에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요크 중심가로 복귀 하기 전 마켓 타운인 헴슬리의 어느 펍에 들러 3.6파운드를 내고 블랙십이란 이름의 생맥주를 목구멍으로 들이밀었다. 이튿날 오전, 요크 시내를 홀로 어슬렁거렸다. 

카페 레이 & 웹에서 아보카도와 말린 토마토를 곁들인 토스트를 블랙커피와 함께 먹었으며, 정처 없이 걷다 섐블즈 시장에서 돼지고기 살코기와 튀긴 껍데기를 빵에 끼운 허술한 버거도 씹었다. 호텔 초콜릿(호텔이 아니라 초콜릿 전문점이다)에서는 10파운드를 들여 초콜릿 3개를 구매했다. 노르스름한 빛깔이 너울거리는 요 크의 면모는 자연스레 위스키를 떠올리게 하지만 예전 요크의 최대 산업은 초콜 릿이었다(지금은 보험). 그 유명한 초콜릿 코팅의 크런치 바 ‘킷캣’의 탄생지가 바로 요크다. ‘컨테이너 상가’ 스파크에서는 손바닥만 한 카페를 운영 중인 아일랜드 출신의 콜린 에버렛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서울에 3년 간 머물며 종로의 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종로, 을지로, 명동 일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으며 여전히 삼계탕과 만두를 그리워하는 볼 빨간 콜린이 헤어질 때 이런 말을 건넸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곧잘 까 먹거나 묻어두고 있는 격언. “인생은 어드벤처, 인생은 여행.”

다시 태어난 건축의 도시
로테르담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유로스타에 몸을 실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의 수로인 도버해협을 건너는 쾌속열차. 탑승을 위해 여권 심사와 수하물 검사를 차례로 받는 도중, 22년 전 연정을 품었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대책 없이, 즉흥적으로 감행한 배낭여행의 추억이 불쑥 떠올랐다. 미국 텍사스에서의 어학연수도 잠시 중단한 채 급작스레 런던으로 날아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런던의 한 호텔에서 조우했으며, 며칠 지나 독일의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마른손을 들어 이별(솔직히 말하자면 포기)했다. 그때도 유로스타를 이용해 런던에서 벨기에 브뤼셀로 건너갔었지. 열정과 칠정이 말라버린 지금이야 헛웃음 나는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간절하고 심각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유로 스타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지난해 네덜란드까지 노선이 확장된 것이다. 세인 트판크라스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의 15번 코치 24번 좌석에 앉아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번갈아 마시며 3시간 15분을 흘려보냈더니 브뤼셀과 암스테르 담을 거친 기차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중앙역에서 몸을 풀었다. 

네덜란드 버금의 도시이자 유럽 최대의 무역항인 로테르담은 다시 만들어진 도시, 환골탈태의 도시, 상전벽해의 도시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 이듬해인 1940년, 6일간 이어진 독일 나치의 공습으로 로테르담은 그야말로 거덜이 났다. 3만여 명 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2만 5000여 채의 주택과 1만 1000여 개의 건물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시의 80퍼센트가 폐허로 변했으니 전후 복구는 복원이 아니라 창 조에 가까웠다. 로테르담의 선택은 전복과 혁신, 복고로부터의 탈피였다. 주저앉은 성당을 다시 올리는 일만 빼면 과거의 형태로 회귀하지 않았다. 추상화가의 붓 터치처럼 거침없고 대담한 시도가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건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중앙역의 지붕은 상승감이 확연한 비 대칭이다. 보행자용 다리 위에 세운 주택 큐브 하우스는 마치 가오 리연 수십 개를 이어붙인 것처럼 보인다. 로테르담 인근의 작은 마을 스피케니세 의 공공 도서관 북 마운틴에는 산 모양의 서가를 들여놓았다. 룸 메이트 브루노는 개성적인 호텔 이름만큼이나 허를 찌르는 색 깔 차용과 남다른 인테리어 감각으로 빛을 발한다. 로테르담이 준비한 눈부신 건축의 성찬 가운데 백미는 지난 2014년 선보인 마르 크트할이다. 96개의 상점과 228세대의 주거 공간이 할거하는 일종의 주상복합 건물로 1~2층은 상가, 3~13층은 아파트다. 12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네 덜란드에서 가장 큰 지하 주차장도 갖췄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마르크트할은 건물 디자인부터가 탄성을 자아낸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말발굽(혹은 롤케이크)을 닮았는데, 유리로 마감된 아치 형태의 건물 중앙이 뚫려 있다. 덕분에 실내에 있어 도 개방감이 대단하다. 지역 화가들의 그림을 프린트해서 붙인 ‘천장화’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설계를 맡은 건축 회사의 한국인 건축가 이교석의 말을 빌 리면 마르크트할은 도심 공동화를 해결하기 위한 로테르담시의 승부수이기도 하다. 시는 주거 공간 분양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훌쩍 뛴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교외로 떠난 중산층을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다.

실제로 마르크트할에는 외곽에서 도 심으로 유턴한 60세 이상의 입주민이 많다고 한다. 지역 상인 및 소규모 자영업자 들과의 공생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다. 마르크트할 앞에서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오픈 마켓이 열리는데, 이때 상인들에게 지하 주차장을 무료로 제공한다. 이교석 건축가에게 로테르담의 건축 저력 및 세입자 보호 정책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에 따르면 로테르담은 건축, 미관, 경관, 문화재, 도시계획 등 으로 나뉘어 있는 심의 주체와 체계를 하나로 통합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또 연 간 8퍼센트 이상의 월세 인상이 불가능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임대인과 임차 인 사이의 계약 기간이 없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대성당과 맥주로 먹고사는 도시
쾰른

쾰른 대성당과 쾰슈. 이번 여정의 마지막 도시인 독일 쾰른은 거칠지만 이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기차 여행자들은 중앙역을 빠져나오기 전부터 통유리를 매개로 ‘상영되는’ 대성당의 오라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착공과 준공 사이의 600년이란 세월(공사 중단 기간이 길기는 하다), 사용된 석재 30만 톤, 탑 높이 157미터, 탑 꼭대기로 오르는 533개의 원형 계단, 7000제곱미터의 성당 앞면 면적(축구장 크기와 엇비슷하다), 전체 1만 제곱미터 크기의 스테인드글라 스, 한 해 평균 600만 명의 방문객 등등. 

독일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꼽히는 쾰른 대성당의 위용은 숫자가 말해준다. 물론 내부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는 수치와 통계로 포획되지 않겠지만. 성당이 검게 그을릴 수밖에 없었던 애연한 사연도 마찬가지고. 짧았지만 깊었던 대성당 투어를 마치고 도심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호엔촐레른 철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물쇠가 물려 있었다. 사랑이 어디 자물쇠로 지켜질까. 철망에 자물쇠를 채운 사람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생면부지의 결혼식도 마주쳤다. 신부의 얼굴에 수박처럼 시원한 웃음이 걸렸고, 신랑의 얼굴은 가벼운 홍조를 띠었다. 보는 나는 괜스레 속이 타고 목이 탔다. 마침 관광청이 예약해둔 식당 겸 맥줏집인 프뤼암 돔에 갈 시간이었다. 타는 목마름에 맥주만 한 것이 있겠는가. 식당 내부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얇고 긴, 새치름한 200밀리리터짜리 잔에 담긴 것은 쾰른의 지역 맥주 쾰슈. 상대적으로 작은 잔을 사용하는 것은 맥주 거품이 쉬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쾰슈는 전용 잔의 용량이 작은 데다 맛이 가볍고 청량해서 연거푸 들이 켜게 된다. 그만 마시고 싶다면? 빳빳한 종이 깔개를 맥주잔 위에 덮어놓으면 된다. 사족 2가지. 쾰른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소시지나 슈바인스학세가 아니라 사전 정보 없이 감에 의존해 들어간 식당의 크레이프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쾰른 주민이 자신의 ‘최애’ 메뉴라며 ‘간 고기+치즈+시금치+마늘’ 크레이프를 권했는 데,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였는데도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웠 다. 이틀 연속 찾았으며, 크레이프의 종류는 달랐지만 쾰슈는 빼먹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호텔 부근에서 열린 벼룩시장. 무려 32년 동안 오디오를 수집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가 시장에 가지고 온 중고 오디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물건은 1958년에 만들어졌다. 최고가 제품은 1959년산 오디오로 판매가가 280유로. 20여 년 전에 구매해서 완벽하게 복원했단다. 들어보니 음색과 음량이 실로 엄청났다. “어딜가 도 이런 물건 만날 수 없다”는 그의 자부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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