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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반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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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은 꼭 사람 같다. 눈만 마주쳐도 “하이!”를 건네는 해사한 캘리포니안과 달리 보수적이고 완미한 보스토니안처럼 재킷 앞섶을 꽁꽁 여민 느낌이랄까? 이 도시는 하루 이틀, 한 번 온 사람들에겐 결코 속을 안 보여준다. 20만 보라는 엄청난 도보량과 씨름한 끝에 보스턴의 반전 매력을 발견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보스턴을 편애한다.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 체 뭐가 있는데요?>엔 그가 여행하거나 살았던 각기 다른 지역 10곳이 나오는데, 보스턴만 굳이 보스턴 1, 보스턴 2로 나눠 두 번 소개한다. 문투도 다르다. 다른 편 에선 대개 건조하거나 설명조거나 냉소적이지만 보스턴 편에선 꼭 짝사랑에 빠 진 호들갑스러운 소녀 같다. 그 문장을 소리 내서 읽어보면 ‘아첼레란도(점점 빠르 게)’ 가 붙은 악보 앞에서 호흡이 고조된 연주자가 된 기분마저 든다. “여름에는 가로수가 산책길에 짙고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스턴의 여름은 누가 뭐라 하든 멋진 계절이다. 하버드와 BU(보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레가타(조 정, 요트, 보트 경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연습에 여념이 없다. 

여자들은 잔디 위에 타월을 깔고 iPod을 들으며 무척 과감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긴다. 밴에 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동식 가게도 있다. 누군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개는 플라스틱 원반을 쫓아 달린다. (중략) 그것이 찰스강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찾아와 각자의 방식으로 강을 돌며 자신들의 생활을 즐긴다. 그냥 느긋하게 산책 을 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고, 아니면 롤러블레이드를 즐긴다(어떻게 그런 무서운 것을 ‘즐길’ 수 있는지 솔직히 도통 모르겠지만). 사람 들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유유히 흐르는 이 강으로 모여든다.” “강변이 다 그렇지 뭐. 찰스강Charles R.만 잘났나?” 보스턴으로 향하기 전, 나는 다섯 번도 넘게 읽은 이 에피소드를 또 읽으며 입을 비죽였다. 몇 년 전 이 도시를 아주 잠깐 여행했을 때 ‘또 가고 싶을 정도’의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한 탓이다. 보스 턴 여행기에 표제처럼 붙는 문구들(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 하버드 대학교, 보스턴 레드 삭스, 클램 차우더 같은)이 매력적인 건 알지만, 그건 초행길 에 이미 다 둘러봤다. 어떤 도시에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기꺼이 들려면 관광 과 체험 이상의 매력이 필요하다. 보스턴으로 향하는 직항로가 뚫린 덕에 여정은 편안했다. 

로건국제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곧장 시내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색이 너무 낯설어서 눈을 비볐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본 게 언제 적이었나? 메일함, SNS보다 더 자주 들 여다보는 대기 질 체크 앱에서 나는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만났다. 연두색과 함께 선명하게 나타난 한 자릿수 숫자, 1[참고로 같은 시간 서울의 AQI(대기 질 지수)는 127이었다]. ‘새로 고침’을 해도 변함없는 1은 보스턴에 대한 기대감을 단박에 끌 어올렸다. 이런 숫자는 메인 섬에서 한참 떨어진 소도, 일본 이시가키나 호주 태즈 메이니아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수치인데. 이렇게 맑고 달콤한 공기라면 뭐든 해야 한다. 도착한 첫날부터 횡격막을 잔뜩 열고 도시 곳곳을 휘저었다. 그간 초미세먼 지에 절여진 폐가 전부 씻기고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보스턴의 깨끗한 공기와 13 시간이라는 시차 덕에 짧아진 잠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여행자의 게으름에 채찍을 휘둘렀다. 

나의 만보기엔 매일 2만 보에서 3만 보 사이를 오가는 낯선 숫자 가 찍혔다. 그 덕에 온전히 두 발로 보스턴의 속살을 헤집었다. 걸으며 마주한 두 번째 보스턴은 몇 년 전 이 도시에서 받은 알량한 첫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었다. 도착 후 처음 맞는 아침, 찰스강을 따라 가볍게 달려볼 요량으로 오전 7시부 터 숙소를 나섰다. 출근 인파 못지않게 거리를 메운 ‘달리는 행렬’은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더군다나 주말도 아니고, 일주일 중 피로도가 가장 높은(개인적 견해 다) 수요일 아침에! 달리는 사람만큼이나 걷는 이도 많다. 그중 절반은 반려견과 함께였다. 누군가 “보스턴에서 가장 ‘핫’한 게 뭐야?”라고 묻는다면, “탄성 좋은 운 동화와 레깅스, 드라이핏 티셔츠를 쿨하게 차려입고 잘 뛰는 일”이라고 대답하겠 다. 이 도시에 대해 좀 안다면, 그 차림이 보스토니안의 유니폼이라는 말에 반기 를 들 이는 없을 것이다. 걷고 뛰는 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도시에서 일주일간 20 만 보가량 걸었다. 그 경이로운 숫자 뒤에서 보스토니안의 삶을 천천히 뜯어 관찰 하고, 엿보고, 경험하며 하루키의 호들갑에 품은 반감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의 말 마따나 보스턴은 “내리쬐는 햇볕의 느낌도 다른 곳과 묘하게 다르고, 시간도 특별 한 방식으로 흐르는” 것 같은 도시였다. 머무는 내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바람 이 세차게 불어도, 사람들의 표정이 검박한 적벽돌 건축물만큼이나 엄중해도, ‘언 젠가 보스턴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출근 

비컨힐에서 찰스강까지

녹지를 걷든 시내를 훑든 혹은 미국독립전쟁사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프리덤 트 레일’을 따라가든, 걷는 이는 일단 보스턴코먼에서 모인다. 1634년에 문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공원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못지않게 땅값 높은 도시에서 이 공원은 속없는 벌판처럼 넓게 펼 쳐져 있다. 공원의 사방 꼭짓점이 모두 번화가로 뻗어 있어서 어디로든 향하기 좋다. 이 좋은 ‘목’이 보스턴과 미국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독립 운동의 움직임, 노예제도 철폐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연설 등 이 나라에서 굵고 큰 변화를 만든 시민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보 스턴이 ‘미국의 아테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개진할 수 있었던 열린 광장, ‘보스턴코먼’ 덕이다. 보스턴에 머무는 내내 호텔에서 느린 걸음으로 3분 거리에 위치한 보스턴코먼에 매일 들렀다. 아침이든 늦은 오후든 밤이든 공원은 늘 그때와 어울리는 활기를 띠 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해 질 무렵. 목줄에서 해방된(허락된 구역이 있다) 반 려견이 마음껏 뛰어놀고 아이들은 푸른 지붕 아래서 회전목마를 타고 젊은이는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인지 참고서인지 모를 것을 읽는 풍경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 지던 순간. 하루의 황혼을 부드럽게 끌어안는 주홍빛 석양은 (종일 걷느라) 퉁퉁 부은 발과 허기에 아랑곳 없이 뭔가에 홀린 좀비처럼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 

좀 더 걸을 수 있는 날엔 아침저녁으로 비컨힐을 찾았다. 공원 맞은 편, 인권 운동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미국에서 최초로 노예제도 폐지 연설을 한 파크 스트리트 처치를 오른쪽에 두고 걷다 보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만난다. 비컨힐은 매사추세츠주정부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이 도시의 명백한 상징이다. 17세기, 영국에서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처음 마을을 세웠 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스턴 최고의 부촌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딱 딱한 상징적 의미와 역사적 사실이 비컨힐을 산책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건축가 이중원은 <건축으로 본 보스턴 이야기>에서 이곳이 왜 ‘걷고 싶은 거리’인지 설 명한다.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담으로만 만들어진 거리는 결코 걷고 싶은 거리가 아니 다. 끊임없이 내것과 우리 가족 것만을 중시하는 문화가 팽배해지고 만남과 대화 의 장소인 거리는 소외된다. 열린 사회와 투명성이 높은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 는 길이 내 집 앞에서 멈춰버린다. 담으로 둘러싸인 주택이 동네 전체에 미치는 영 향에 대해 비컨힐은 날카롭게 비판하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걷는 사람이 ‘주인’인 길의 또 다른 매력은 한 치의 변덕도, 틈도, 흐트러짐도 없이 정직하게 지어진 적벽돌 건물의 완벽한 균형이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각기 다른 파사드는 루이스 칸의 명언 “건축의 파사드는 거리의 얼굴이다”를 이해할 수 있 는 완벽한 교본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가 숙제처럼 비컨힐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컨힐 사람들은 화단과 문고리, 팻말 등으로 엄격한 균형 속 에서 창의적인 균열을 낸다. 

비컨힐 아랫동네, 찰스 스트리트엔 발목을 잡는 가게가 많다. 보스턴 에서 유명한 카페와 식당, 독립 패션 숍 등이 병정처럼 도열해 있다. 걸음의 리듬 을 깨고 싶지 않다면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한다. 러닝복과 운동화를 파는 상점(그렇 다. 보스턴엔 ‘나이키’나 ‘아디다스’ 매장이 아니라 러너에게 필요한 모든 스포츠 용품을 모아 파는 복합 매장이 많다)을 겨우 참아낸 나는 찰스강으로 향하는 골목 진입로에서 보스토니안이 사랑하는 빵집, 타테의 공격을 받고 유혹에 굴복했 다. 여기에서 매일 아침 신선한 빵과 커피를 먹었다는 뜻이다. 외곽 도로를 가로지르는 롱펠로 브리지를 건너면 드디어 찰 스강에 닿는다. 보스턴코먼에서 찰스강까지는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빠른 걸음 으로 15분 안팎 거리다. 이곳엔 거짓말처럼, 걷거나 달리는 이만 있다. 강 위도 카 약, 윈드서핑, 조정을 즐기는 이들로 분주하다. 한강을 곁에 두고 사는 서울 사람 에게 ‘치맥’과 라면, 가끔 족발이나 짜장면이 주인공인 풍경과는 사뭇 달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운동복 차림이 아니었는데도 카메라를 들고 같이 달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싫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모든 풍경이 그림 같아서 하염없이 바 라봤을 뿐이다. 보스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걷고 뛸까? 당신이 만약 보스턴 사람 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나와 같은 대답을 들을 것이다. “글쎄. 잘 모르겠 는데. 그냥 옛날부터 그랬어.” 하루키 말마따나 ‘그냥 옛날부터 그랬던 것이 꽤 많 은’ 것은 보스턴의 진짜 매력일 수도 있다.

케임브리지의 낭만

“남의 대학교는 뭐 하러 또 가?” 5년 전 하버드대학교 교정을 취재했던 사실을 알 고 있는 친구는 “나 오늘 하버드 간다”는 유치한 자랑에 핀잔을 던졌다. 그 앞에서 “오늘이 세 번째인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물론 내게 ‘하버드대에 진학 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떨어진’ 과거 같은 건 없다. 그냥 좋아서 간다. 하버드대 캠퍼스엔 뭐라고 딱히 설명할 길이 없는, 괜히 설레는 기운이 있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기엔 아직 젊은 나이지만, 그런 비슷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같다. 시내에서 지하철 레드 라인을 타고 하버드 스퀘어에서 내 리면 케임브리지의 마스코트, 하버드대학교에 쉽게 닿는다. 광장은 노숙자와 거리 예술가, 학생과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하다. 하버드 캠퍼 스는 담장 안에 모인 구조가 아니라 굉장히 커서, 생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 혼자 둘러보기엔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어디가 어딘지 알고 보고 싶다면 하버드대 학 생이 자주색 로고 티셔츠와 밀짚모자를 쓰고 캠퍼스 곳곳을 안내하는 (유료) 하버 드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해볼 것. 발끝을 만지면 자녀가 하버드대에 진학한다는 낭설로 유명한 존 하버드 동상에 얽힌 비화(하버드대 신입생들이 의식처럼 동상 에 소변을 갈긴다는 정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딸 말리아와 시진핑 중국 국 가 주석의 딸 시밍쩌가 묵었던 기숙사,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가 재학 시절 즐겨 먹었던 캠퍼스 앞 피자집이 그리워서 전용기를 타고 날아왔다는 얘기 등을 교정 가이드, 자신의 대학생활과 함께 적절히 버무려 친근하게 안내한다. 

안내자가 없어도 둘러볼 방법은 충분하다. 캠퍼스 안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 히 통제하는 강의실, 도서관, 기숙사 말고도 공공을 위한 장소가 꽤 있다. 북미 유 일의 르코르뷔지에 건축물 ‘카펜터 센터’, 하버드 아트 뮤지엄, 하버드 자연사박물관, 사이언스 센터 등이 예. 박물관과 미술관을 자주 들락이는 이라 면 알겠지만 한나절을 온전히 들여도 전시 공간을 2곳 이상 소화하긴 힘들다. 골 라서 둘러보란 뜻이다. 하버드만 세 번째인 ‘캠퍼스 덕후’의 선택은 카펜터 센터와 하버드 자연사박물관. 그 전에 허기 먼저 채울 요량으로 출발 전부터 구글 지도 앱에 초록 깃발을 꽂아 둔 ‘클로버’로 향한다. MIT를 졸업하고 하버드 MBA를 이수한 에어 뮤어가 문 연 ‘건강한 패스트푸드 식당’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푸드 트럭에서 출발해 지 금은 하버드점을 비롯해 보스턴 시내에 5곳의 식당과 10대의 푸드 트럭을 운영 하고 있다. ‘새 브랜드’에 굳이 마음을 열지 않는 까다롭고 보수적인 보스토니안 의 입맛을 저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내가 한번 먹어보마’ 별렀던 곳이다. 찾 기 전부터 숙지한 이상한 주문 방식(계산대가 따로 없다. 아이패드 들고 매장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가서 “주문해도 되냐”고 물으면 친구처럼 말도 걸고 메뉴도 설명하고 주문도 받는다)과 음식을 받는 의식(셰프가 음식을 다 만들면 쩌렁쩌렁 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친다)을 거쳐 콩고기 피타 샌드위치를 두 손에 받아 들 었다. 중독을 부르는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담백한 풍미에, 빨리 씹어 삼켜도 속이 편했다. 주문 즉시 갓 내리는 커피를 곁들이면 걷느라 닳은 체력이 금세 보충된다. 하버드 교정엔 영국 건축의 아버지 제임스 스털링이 “건축 동물원 같다”고 표현 할 만큼 세계적인 건축물이 많다. 지도 없이 뭔가를 찾아 다니길 좋아한다면 보스 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공공도서관’을 지은 건축가 찰스 매킴의 하버드 게이트, 미국 건축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헨리 리처드 슨의 세버 홀, 하버드대학교의 설립 이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성경 구절이 새겨진 기 로웰의 에머슨 홀을 빠르 게 찾아 훑어보자. 앞선 건축물들과 달리 카펜터 센터는 외부인이 안까지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컨템퍼러리 아트 전시와 공공 예술 프로그램, 독립 서점 모 토에서 운영하는 아트 북 숍 등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져 있다. 유리 벽 사이 로 언뜻 보이는 학생들의 작업 스튜디오, 푸른 나무와 하늘, 볕을 신비롭게 담는 계단의 통창도 이 장소에서 눈여겨볼 만한 매력이다. 하버드 자연사박물관은 규모는 작지만 공룡, 파충류, 대형 포유류, 조류, 어류의 생생한 박제, 크로노사우루스 화석, 보석의 원석과 운석, 광물, 글라스 플라워로 알려진 식물의 블라쉬카 유리 모형 등 ‘알아야 할 것, 봐야 할 것, 신기한 것’은 살 뜰히 갖추고 있다. 관람객이 적은 시간대에 방문하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 선 동식물 표본에 둘러싸여 혼자 있는 기분, 저들이 다 살아서 금방이라도 유리 벽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철없는 상상을 만끽할 수도 있다.  

보스토니안의 삶, 마켓 플레이스

마켓 플레이스는 아마도 ‘걷기’에 가장 즐거운 장소일 것이다. 평소 걷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면 더더욱. 이곳에서 도보란 먹기 위한 이동 행위다. 이거 먹고 조금 걷고, 다음 거 먹기 위해 조금 걷기. 그 먹보 대장정에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원칙은 ‘한 곳에서 배부르게 먹지 않기’다. 보스턴은 대서양에 면한 도시다. 신선한 해산물을 날것으로 즐기거나 그걸로 조 리한 음식을 경험하는 일을 ‘할 일’의 상단에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마켓 플레이 스, 시장엔 그 먹거리가 많다. 서울에서도 발에 차이는 글로벌 브랜드 매장에서 ‘미국이 좀 더 싸다는 핑계로’ 쓸데없는 쇼핑 하느라 정신과 시간 빼앗기지 말고, ‘먹을 음식 목록’을 짜서 하나씩 지우는 치밀함을 발휘해보자. 아, 그 전에 마켓 플레이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곳은 보스턴코먼에서 시 작한 프리덤 트레일의 끝자락, 파뉴일 홀을 중심으로 퀸시 마켓, 사 우스 마켓, 노스 마켓, 조금 더 멀리 떨어진 퍼블릭 마켓이 다닥다닥 모인 광장이다. 파뉴일 홀은 미국 독립혁명의 발상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혁혁한 공 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 새뮤얼 애덤스(그렇다. 맥주 이름으로 남은 미합중국의 위 대한 운동가로 우리의 김구 선생만큼이나 미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가 ‘독 립’을 부르짖으며 연설한 장소로 유명하다. 1826년에 지어진 퀸시 마켓은 건축가 벤저민 톰슨이 이 구역을 둘러싼 고층 빌딩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려낸 역사적 사실 때문에 보스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다. 

이 안에선 조 갯살이 콩나물 시루처럼 꽉 들어찬 보스턴 클램 차우더, 랍스터 요리, 보스턴 크림 파이를 한 동선에서 ‘클리어’할 수 있다. 참고로 보스턴 크림 파이는 ‘파이’가 아니 다. 시트 사이에 커스터드를 채우고 초콜릿으로 덮은 케이크다. 무려 매사추세츠 주의 ‘공식’ 디저트로, 보스턴 크림 도넛과 자매지간(?)이다. 칼로리는 어마어마하 지만 정수리까지 아찔할 정도로 달콤해서 먹지 않고 지나치긴 힘들다. ‘굴’도 목록에서 빼먹지 말아야 한다. 의미 있는 장소에서 즐기고 싶다면 인근의 ‘유니언 오이스터 하우스’를 찾자. 1826년에 문 연, 무려 ‘미 국 최초의 식당’이다(보스턴이 미국 최초의 도시기 때문에 어쩌면 이 도시에서 ‘미 국 최초’라는 수식어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1742년에 지어진 건축물 로, 식당 전엔 잡화점, 미국 최초의 신문 인쇄소, 독립혁명 당시 군인들의 급료 지 불소, 라는 독특한 과거를 품고 있다. 보스턴 굴의 주종은 둘로 나뉜다. 리틀넥과 체리 스톤. 둘 중 체리 스톤의 풍미가 더 깊고, 크기도 크다. 입안으로 후루룩 집 어 넣으면 “씹어볼 게 좀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캘리포니아산 샤르도네, 워 싱턴주의 피노 그리는 물론, 새뮤얼 애덤스 생맥주와도 아주 잘 어울린다. 대낮에 500년도 넘은 건축물 안에 앉아 이 싱싱한 만찬을 즐기다 보면 “이메일 답장? 연금 가입? 알게 뭐야”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꼬장꼬장하고 빈틈없는 도시에 서 낮술 당기며 “Who cares?” 할 줄 누가 알았을까? 보스턴은 한 번 ‘온’ 사람에 겐 이런 매력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사는 사람, 재차 온 사람들만 이 느슨한 쾌락을 비밀스럽게 누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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