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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썰미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 쓰고 뉴스 진행했다고 실시간 검색어에

전문 직업인으로서 그저 안경 하나 썼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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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온라인에서 자주 보이는 댓글이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같은 남녀 대립 글이나 페미니즘 이슈에 민감한 콘텐츠에 달리는 댓글이다.

우리는 왜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싸우는 걸까?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는 워낙 많이들 이야기하니,  나는 최근 본 책 몇 권에 나온 이야기로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1.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 쓰고 뉴스 진행했다고 실시간 검색어에

한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TV 뉴스를 진행해 하루종일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기사까지 쏟아지는 거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 그러고 보니 안경 쓰는 남자 아나운서는 있어도 여자 아나운서는 본 적이 없네” 하고 현실을 새롭게 인지하게 됐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예전에 방송 일을 하던 시절, 같이 프로그램을 했던 아나운서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녀는 매일매일 뉴스를 진행하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장시간 콘택트렌즈를 착용해야 했다. 진한 눈 화장까지 하니 눈은 더 뻑뻑해지고 가끔 화장품 가루가 날려 눈에 들어갈 때면 아파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녀는 눈이 불편해 안과에 다녀오고 나서도 곧 있을 방송 때문에 당연한 듯 렌즈를 눈에 욱여넣었다.

안경 쓴 여자 아나운서가 없다는 것에 내가 처음 의문을 던진 건 고등학생 때였다. 아나운서라는 꿈 하나에 의지해 힘든 수험 생활을 버티던 시절, 아나운서들은 다 눈이 좋은 건가, 아니면 나처럼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아나운서가 될 수 없는 건가,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니 애초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머릿속에 심각한 고민들이 오갔다.


그 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아나운서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됐다.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만 관행처럼 어느 누구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TV에 한 번 나오기 위해 한 시간 넘게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을 받는다는 것. 남자 아나운서는 나이가 들수록 자리가 굳건해지는데 여자 아나운서는 젊은 시절 반짝 빛을 발하고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 이런 현실을 알고 나니 여자 아나운서를 ‘방송의 꽃’이라고 부르는 게 불편하게 다가왔다. 진실함, 공정함, 전달력 같은 능력보다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는 사회적 시선이 아나운서 지망생으로서 유쾌할 리 없었다.


안경 쓴 여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건 방송계만의 일이 아니었다. 졸업을 앞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던 취업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올라오던 질문 중 하나도 안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는 여자인데 면접을 볼 때 안경을 껴도 괜찮을까요?” 심지어 안경을 쓰는 게 더 잘 어울리는데, 또는 렌즈를 끼는 게 너무 불편한데 면접 때 꼭 안경을 벗어야만 하느냐는 질문도 많았다. 그 글에 달린 댓글의 20퍼센트 정도만 자연스러운 게 좋으니 그냥 안경을 쓰라는 의견이었고,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좋겠다는 답변이 나머지 80퍼센트였다. 면접장에 안경을 끼고 오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학교 취업 담당자가 면접 때 여자는 안경 말고 렌즈를 끼라고 말했다고. 여자가 안경을 쓰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안경은 여자들을 주눅 들게 했다.


아나운서 되기는 정말 힘들었는데, 때려 치는 건 깃털 같더라던 김민영 아나운서의 두 번째 책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중 일부이다. 2쇄도 못찍고 1쇄에서 끝난 거 보면 이 책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한데, 사회에서 만나는 차별, 부조리, 의무, 책임... 이런 단어들의 무게가 새삼 느껴지는 그런 책이다. 각설하고 위에 예시로 든 안경 이야기 같은 경우. 여자들은 늘 당하고, 겪어온 이야기라 새삼 어제오늘 일인가 싶겠지만, 반대로 남자들은 이런 차별이나 불편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페미니즘 관련 콘텐츠들에 달리는 댓글 패싸움의 진정한 원인은 이 두 성별의 온도차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2. 유부녀인 나와 총각이려는 그

화창한 날, 볕이 좋은 날씨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주부들은 날이 좋으니 이불을 말려야겠다 하고 미혼 여성들은 날씨가 아까우니 놀러 가면 좋겠다고들 한다. 물론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이상하게 결혼 후 주부가 되고부터는 볕 좋은 날에는 빨래를 바짝 말리고 싶고 퇴근 후에는 집안일을 무엇부터 해결할까 마음이 바빠진다.


이것은 주부의 습관인가 아니면 노예근성인가? 왜 집안일은 내 몫이 되어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질까? 날씨가 좋다고 집안일을 해야겠다는 남편의 의무감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결혼 후 다른 느낌이 든다. 기혼녀는 여자라는 이름보다는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느라 누가 구속하지 않아도 구속받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아내를 구속하고, ‘어디 여자가?’ 하면서 무시하고 폄하하는 남편도 상당수 존재한다.

태희 씨는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받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첫째는 우리 부모님에게 잘하지 않아서, 둘째는 청소를 잘하지 않아서, 셋째는 남편인 내게 친절하지 않아서, 넷째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아이가 있는 맞벌이 부부인데, 남편은 동분서주하는 그녀가 모든 일에 더 잘하기를 바란다. 그녀에게 늘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녀가 나도 일하니 집안일은 같이 분담하자고 말하면 이런 말부터 나온다. “내가 언제 너한테 일하라고 했어? 그냥 집안일 잘하고 나와 내 가족에게 충실했으면 좋겠어.”


태희 씨뿐만 아니라 많은 아내들이 이런 불평등한 남편의 말에 속이 탄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한 태희 씨 남편이 혹여 갈라섰다고 해서 앞으로 다른 여성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태희씨가 성격 좋고 사람 좋아서 이 정도 맞춰주며 살아준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완벽하게 정리된 집에서 살 수 있나.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집안일을 하는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남편이나 주변의 비난에 스스로 정말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다른 여자들은 일하면서 집안일도 잘하고 애도 잘 본단다. 결혼 후 여성들이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데 옆에서 콕콕 비난까지 하면 정말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결혼은 같이 했는데 몸과 마음과 삶의 변화로 인해 아내만 원하는 삶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더 무장해야 한다. 그런 생각 없는 비난에도 끄떡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존감을 키워야 한다. 나는 소중하고,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인류니까.


<이혼하고 싶은 그녀들의 진짜 속마음>에서는 결혼 생활 속에서 아내들이 부딪히는 문제가 무엇이고, 왜 그녀들이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여성에게 원하는 일이 많고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많다. 분명히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항상 손해보는 것은 여자 편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 살면 괜찮아 질줄 알았는데, 알아서 바뀌지 않는 사회의 편견에 지치고 현실에 상처받는 이들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더욱 서글퍼진다. 사회와 가족, 남편마저도 아내 탓으로 돌린다. 이런 현실에서 온전히 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이런 남녀의 차이, 답은 없는 걸까?

나는 이 답에 대한 힌트를 생뚱맞지만, 어떤 큰 스님의 조언이라는 책에서 얻었다.

3. 문제는 이분법적 사고야

중국 당나라의 법안문익 선사는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있는 큰 방에 들어와 손가락으로 조용히 문발을 가리켰다. 이에 두 제자가 나서서 그 문발을 말아 올렸다. 그러자 법안 선사는 다른 말은 없이 “일득일실”이라고만 말했다.


여기에서 “일득일실”은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명은 좋지만 한 명은 나쁘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만 어느 제자가 좋고 어느 제자가 나쁘다고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법안 선사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사물의 본질을 잘못 판단하지 않기 위해 이분법적 사고를 멈춘다"

나는 이 “일득일실”이라는 말을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훈계라고 해석한다. 이분법적 사고란, ‘선과 악’, ‘옮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길고 짧음’, ‘생과 사’, ‘적군과 아군’, ‘흑과 백’ 같이 양극단을 기준삼아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리적으로 인간은 잘 모르는 것이나 모호한 것을 싫어한다. 어떤 일이든 깔끔하게 빨리 결론을 내린 다음에 안심하고 싶어한다. 모호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때로는 첫인상만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좋다’, ‘나쁘다’ 판단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버려야 채워진다> 책의 뒷부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령 어떤 사람을 ‘적’이라고 간주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려워집니다. “중이 미우면 가사까지 밉다”는 속담의 전형적인 예로, 그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주위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주위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내 편' 혹은 '네 편'만 존재한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은 무조건 옳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은 '적'이라 여기며 무조건 틀리다고 한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대로 믿는 확증편향에 치우치게 한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남성과 여성, 노년층과 청년층, 부자와 빈자 등 이분법적 대결 구도는 감정 소모의 낭비와 함께 심각한 사회적 갈등만 야기할 뿐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82년생 김지영'이든 뉴스에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썼다는 기사든 ‘주위 사람이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를 끌어안은채’ 서로를 향해 겨누는 칼날을 거뒀으면 한다. 한순간에 적대적인 감정들이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조화와 타협이 당연해지는 유연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선한 댓글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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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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