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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가 미국에서 난리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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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영화평론가 김철홍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차에 타 있다. 사실 이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표현이고, 감독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눈을 뜨면’, ‘나’는 차에 타 있다고. 나는 늘 내 자리였던 차의 뒷좌석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깬 것이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가는 날. 운전석엔 엄마가 있고, 조수석엔 누나가 앉아있다. 아빠는 앞에 있는 트럭을 몰며 내가 탄 차를 안내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배경으로 차분한 음악이 깔린다. 이것이 <미나리>의 오프닝이자, 극단적으로 말해 <미나리>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나리>는 아이작 정이자 정이삭인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프로젝트이다. 어느 한국인 이민자 가정의 2세, 지금은 미국인이지만 어쩌면 한국인일 뻔한 한 개인의 어릴 적 회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회상 영화에 미국이 열광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열광의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기생충>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근래의 <미나리>를 향한 찬사와 무려 여섯 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미국 아카데미의 호응은 더욱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나리>는 봉준호만큼 커리어를 쌓은 유명 감독의 작품도 아닐뿐더러, 미국을 제외한 다른 대륙의 유명 영화제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나리>는 외부의 요인 없이 오직 <미나리> 자신의 힘만으로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영화인 것이다.

<미나리>가 만약 한국 신인 감독의 영화였다면, 정 감독은 봉준호와 홍상수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감독 중 한 명으로 호명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정 감독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삭이라기보다는 아이작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구태여 덧붙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나리>가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었던 사람이 만든 미국 영화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아놓지 않고선 이 ‘미며듦’ 현상에 대해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물이 한국 배우가 연기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오직 우리(한국인)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한편, 미국인의 입장에서도 이 영화는 ‘우리’에 대한 영화이다. 이민자 스토리란 결국 미국인이 아직 미국인이 되기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울>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레이트 비포’인 셈이다.

<소울>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만들어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미나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미국인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는가.’ ‘우리는 우리가 되기 전의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었는가.’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친절한 영화 <미나리>엔, 이 ‘당신이라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국인들 스스로를 감정이입 시킬 수 있는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농장 일을 도와주는 폴이 있고, 농사 짓기 딱 좋은 시절이라는 말을 하며 데이빗에게 사탕을 주는 부동산 업자, 그 외에 병아리 부화장의 사장과 교회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보며 한국인 캐릭터에 이입을 하는 동안, 미국인들은 이 백인 캐릭터들에 이입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워킹데드> 시리즈에서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연기한 글렌이라는 캐릭터의 활약에 우리가 특히 더 열광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때는 데이빗이 처음으로 교회에 간 날이다. 데이빗은 이곳에서 또래의 백인 아이 조니를 맞닥뜨린다. 할머니가 교회에 내야 할 헌금을 몰래 챙기는 것을 본 데이빗은 순간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조니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는 데이빗과 조니를 정면으로 차례차례 보여주는데, 이때 한국인은 당연히 데이빗의 감정을 따라가는데, 반면 미국인으로써는 조니에 이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앞으로 데이빗과 가족들이 이 커뮤니티에서 어떤 곤란을 겪게 될지를 걱정하며 영화를 보게 되지만 미국인들은 반대다. 이 이방인들을 보고 ‘나라면 어떻게 그들을 대할까’가 그들의 감정 선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는 미국인들에게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미나리>에 나오는 미국인들은 모두 친절하고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나리>엔 2021년 현재에도 아직까지 소란스러운 인종 차별/혐오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서구권 국가에 잠시 여행만 다녀와도 저마다 크고 작은 인종 차별 에피소드를 하나씩 만들어오는 마당이지만,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아칸소 주에서는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일어났을 수도 있으나, 영화엔 그것이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미나리>의 서사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조금 밋밋하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차별이 만연한 현재의 미국을 살고 있는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폴은 자신의 고집대로 농장을 만들려는 제이콥에게 미국의 방식을 확실하지만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깨워주고, 이웃들은 그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경제적인 힘도 없는 이방인들을 조심스레 일으켜 세운 다음, ‘빅 아칸소 박수’를 쳐준다. 그렇게 그들과 더불어 커뮤니티를 이룩해나간다. 마치 이것이 진짜 ‘그레이트’한 미국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어떤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보여주며 일종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미나리>를 <포레스트 검프>나, <국제시장>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세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하나의 ‘인생 명령’을 받고, 마침내 이를 수행해낸다는 것이다. 포레스트는 위기의 순간마다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덕수는 끝끝내 꽃분이네로 가서 가족을 지킨다. 그리고 데이빗은 “Strong boy”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진짜로 강한 사람이 된다.

다른 것은 엔딩이다. <포레스트 검프>와 <국제시장>의 마지막엔 두 주인공이 돌아가신 각자의 부모님에게 못 다한 말을 전하는 독백이 있지만, <미나리>엔 그것이 없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지금도 트레일러에서 산에서 온 이슬 물을 마시고 있는지 영화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할머니가 심어놓은 미나리는 좋은 자리를 찾은 덕분에 잘 자랐고, 제이콥은 이를 보며 “맛있겠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이 한국에서 건너와 미국 땅에서 자란 ‘미나리’는 과연 한국 것인지 미국 것인지, 대체 <미나리>는 한국 영화인지 미국 영화인지, 정말 말이 많은 영화였지만,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는 이 순간만큼은 전 세계인들 모두 할머니가 집에서 데이빗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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