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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디트

매너리즘에 빠진 어른을 위한 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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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 달에 고른 다섯 권은 믿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읽어보면 어떻게든 도움이 될 책들이다. 판타지 속에서 잠시 현실을 잊을 수도,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게 될 수도, 수익률 좋은 금융상품에 가입할 수도 있다. 잊지 말자.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은 회복력!


1
<믿습니까? 믿습니다!>
“예언은 모호할수록 좋다.
현실은 점괘처럼 직관적이지 않으니까.”

한때 내 절친 J의 취미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얼마 안 되는 복채를 쥐여주고 미래를 묻는 것이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었단다. “자네는 사주가 너무 좋아서, 점 보러 다닐 필요도 없어. 그냥 걱정 없이 살면 되니까 나한테도 오지 마.” 장사수완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점쟁이의 사주풀이를 듣고도 J는 취미생활을 끊지 않았다. 그가 점을 보러 다니는 이유는 정확한 미래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니 사주 참 좋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니까.


그랬던 J가 몇 달 전 취미 생활을 그만뒀다. 집 근처 새로 생긴 타로가게의 타로 마스터가 ‘다음 주 월요일에 엄청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했는데 월요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여기까진 뭐, 괜찮았다. 다시 타로 집을 찾아가 J가 넌지시 묻자, 너무 솔직한 타로 마스터가 양심선언(?)을 해버렸다. “기분 좋으시라고 그냥 거짓말한 거예요. 미안해요.” 그 후 J는 남에게 미래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미신에 기대하는 건 ‘미래를 맞혀 달라’가 아니다. 미래가 올 때까지 ‘믿고 의지하게만 해달라’는 거다. 고대 신의 예언부터 2021년의 가짜뉴스까지 미신의 역사가 총망라된 이 책이 미신을 신봉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이유다. 중요한 경기 때마다 대학 시절의 유니폼을 받쳐 입고 나서 실력을 100% 발휘한 마이클 조던과 가짜뉴스만 믿고 의지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 좋은 미신 나쁜 미신 따로 있나. 인간 하기 나름이지.


  • <믿습니까? 믿습니다!> 오후 | 동아시아 | 16,000원


2
<2년 8개월 28일 밤>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인도 출생의 작가 살만 루슈디는 상당 기간을 테러 위협 속에 보냈다. 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욕한다고 여겨 이란의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그에게 ‘이슬람식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슬람 신도들은 소설의 판매 금지를 요구하며 서점에 화염병을 던지고, 루슈디의 허수아비 인형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의 소설을 번역한 일본인 번역가가 살해당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암살 위협 때문에 그는 거의 10년 동안 공식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지금도 밖을 다닐 땐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기를 쓰고 농담을 던진다. 1995년 <데이비트 레터맨 쇼>에 출연해 한 말처럼.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너무 낮아서 숨어 있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행히 그가 쓴 소설은 맘 편히 웃으며 볼 수 있다. 한 작품(<한밤의 아이들>)으로 부커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거장답지 않게, 그의 소설은 재밌다. ‘신화, SF, 모험, 액션, 만화의 요소를 결합시킨 독특한 서사’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에게 ‘천일야화’ 설정은 딱 들어맞는 옷이다(2년과 8개월과 28일을 더하면 얼마?). 특히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 지망생이라면 그의 소설을 소장하시라. 듣도 보도 못한 흥미로운 설정 덕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주워갈 만한 이야기 씨앗이 후두둑 쏟아지니까.


  • <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 문학동네 | 16,000원


3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어린애가 걱정거리인 이유는 단지 키워야 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보장해줘야 해서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로 유명하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 과연 플라톤이 ‘미친 소크라테스’라 평가할 만하다. 미친 테스형의 면모는 그가 주장한 ‘견유주의’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견’은 개 견(犬)자를 쓰는데, 불안해하지 않고, 친구와 적을 쉽게 알아보고, 수치심이 없어서 아무 데서나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누는 개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개처럼 살고 싶다는 디오게네스를 보며 정작 개들은 ‘꼬리도 없는 게 어딜 감히…’ 무시했겠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꼬리 없는 작가 카렐 차페크는 대왕도 아닌 주제에 감히 개에 대한 뒷담화를 책으로 펴냈다. 디오게네스가 살던 BC 4세기나 카렐이 살던 1930년대나 디에디트가 존재하는 지금이나, 인간은 역시 진정한 철학자가 못 된다. 불안해하고(오줌 웅덩이가 또 늘어나진 않을까), 친구와 적을 못 알아보고(불량스러워 보이는 이웃집 개랑 어울리면 안 돼), 개들의 사랑 나눔을 수치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라(아니, 결국 새끼까지 밴 거야?).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개를 관찰하고, 그리고, 안아주는 저자가 부러워진다. 진정한 철학자 따위 못 되면 어떤가, 개의 ‘반려인’이 되는 것으로 충분한데.


이 책을 집어 든 건 대리 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아직 개나 고양이를 키운 적이 없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없어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눈도 겨우 뜨는 꼬마애들 데려다 얘네 인생에 플러스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마이너스를 안겨주는 건 아닐까?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길들여짐이란 서로를 믿는 상태인 것이다.” 나는 우선 나부터 믿어야겠다.


  •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오후, 카렐 차페크, 요세프 차페크 | 유유 | 13,000원


4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첫 번째 책의 제목은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였다.”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이 책의 부제다. 영화와 관련된 클리셰 79개를 가나다순으로 모아 놨으니 ‘영화 클리셰 사전’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의아한 건 그 앞에 붙은 수식어다. 영화는 그렇다 치고, 클리셰 사전이 재미있을 수가 있나? 지루하고, 뻔하고, 진부하고, 뭐 이런 게 클리셰잖아. “너답지 않게 왜 이래?”라는 말에 “나다운 게 뭔데?”라고 받아치는 식의 대화 같은 거. 심지어 사전이라니. ‘클리셰 좌충우돌 모험담’이라 해도 지루할 판에.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지, 책 맨 앞에 ‘클리셰라는 것’이라는 제목의 머리글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클리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예전에는 독창적이었고 나름대로 진지한 의미를 지녔으나 지금은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 그밖의 기타 등등.’ 지금 좀 낡았을지 몰라도 한때의 독창성과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 현명한 의도를 갖고 살짝 비틀기만 해도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클리셰다. ‘상류층 가족 vs 하류층 가족’이라는 클리셰를 따르는 척 하다가 ‘하류층 가족 vs 더 하류층 가족’으로 비튼 <기생충>처럼. 물론 책에는 그 ‘생각 없음’이 지나쳐 “구토 증세를 말들로 간신히 옮긴” 경우도 더러 있다지만, 그건 그것대로 통쾌하다. 재미없는 영화가 왜 재미없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글은 듀나가 1등이니까.


  •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 듀나 | 제우미디어 | 15,000원


5
<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
“책 살 돈으로 주식을 샀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을까? 뭐… 그냥 잘해서 됐겠지 뭐… 카카오와 네이버는 원래 잘하던 회사니까. 궁금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은행들은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카카오뱅크처럼 하지 못했나. 퇴근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아 피 같은 점심시간을 빼앗아가던, 번호표 하나 쥐여주고 한없이 기다리게 하던, ATM 출금 수수료를 1,300원씩 꼬박꼬박 받아가던 은행들은 왜 카카오처럼 하지 못했나.


저자의 분석은 이렇다. “지금까지 금융 회사는 주어진 위험 수준에서 최대의 수익을 얻는 것에 훈련돼 있었다. 자신을 파괴하면서 달라진 게임을 시작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로 여겼다.” 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자신을 파괴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했으니까. 그렇게 은행은 ‘고객이 원하는 것’과 조금씩 멀어졌고, 고객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그 틈새를 노렸다. 메신저로, 포털로 10년 넘게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온 두 IT기업에게 안전제일주의로 무장한 은행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은행뿐일까?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으면서도 꿈쩍 않는 곳이 또 있다. 퍼뜩 떠오르는 건 언론과 학교다. 기성 언론사의 신뢰도는 바닥을 기고, 교육 정상화는 십수년째 토론 프로그램에서만 반짝 논의되고 곧 다시 흐지부지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기존 언론/학교의 변화를 바라기보다는 차라리 카카오일보, 네이버학교의 등장을 기다리는 게 빠르지 않을까.


  • <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 김강원 | 미래의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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