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없는 아시안 로맨틱 코미디 '우리 사이 어쩌면'
* [우리 사이 어쩌면]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로코의 황금기'라 불렸던 90년대~2000년대 할리우드 작품들을 봤고, [500일의 썸머]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처럼 여전히 좋아하는 작품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장르 특유의 전개나 오글거림을 견딜 항마력이 부족하다고 느껴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년 넷플릭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보면서 로코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이야기를 써봤자 얼마나 잘 쓰겠어'라는 심정으로 시작했던 작품이지만, 막상 보고 난 뒤 든 생각은 '이 집 잘하네'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는데?'였다. 뒤이어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며 울고 웃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최근 한 작품을 더 보고서야 확신했다. 사실은 할리우드 로코(특히 동양인 주연)가 본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장르라는 것을 말이다. 필자를 로맨틱 코미디에 눈 뜨게 한 영화, 넷플릭스 [우리 사이 어쩌면]을 소개한다.
마커스와 사샤는 어린 시절부터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 절친이다. 그러나 충동적인 잠자리 이후 마커스가 사샤에게 상처를 주면서 연락이 끊기고 만다. 16년이 지나 결혼을 앞둔 성공적인 셰프가 된 사샤는 새로운 레스토랑을 차리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고, 우연히(?) 이전과 크게 변한 것 없는 마커스와 재회한다. 서먹함도 잠시,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마커스와 사샤는 금세 가까워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지만 새로운 문제가 둘 앞을 가로막는다.
줄거리에서 보다시피 [우리 사이 어쩌면]은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로맨틱 코미디의 단골 주제를 그린다. 이는 좋게 말해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었다는 의미지만, 반대로 뻔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 작품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디테일한 동양적인 요소로 이야기에 새로움을 불어넣는다.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샤는 잘 나가는 스타 셰프다. 성공적인 레스토랑 사업가인 약혼자와 결혼까지 앞두고 있으니, 일과 사랑(표면적으로는) 모두를 거머쥔 셈이다. 그러나 앞'만' 보는 만큼, 과거를 끔찍한 기억으로 여기거나 공허하고 힘든 현재를 '괜찮다'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견디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마커스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버지와 함께 에어컨 설치일을 하는 그는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두려움에 도전을 회피하고, 어머니를 잃었던 16년 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는 내가 필요해'라 굳게 믿으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코롤라를 여전히 몰고 다니는 것도 마커스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결말부에 다다라서 두 사람은 성장한다. 사샤는 자신에게 소홀했던 부모를 대신해 가족처럼 챙겨주었던 마커스의 어머니와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의 레시피를 토대로 레스토랑을 차린다(사실 이전부터 이를 계획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렇게 믿고 싶다). 마커스는 아버지 혼자서도 잘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에서 벗어나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사샤가 있는 뉴욕으로 날아가 마음을 고백한다.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상대방에 의해 성장한다는 스토리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전개다. 그러나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시리즈 [앨리 웡: 베이비코브라]와 [앨리 웡: 성(性)역은 없다]에서 당찬 모습을 보였던 앨리 웡은 평소 자신의 모습을 사샤에 잘 녹여냈고, 랜달 파크 역시 다소 지질해 보일 수 있는 마커스를 밉지 않은 캐릭터로 노련하게 묘사하면서 두 캐릭터의 케미를 배가한다(참고로 두 사람은 실제로 친구이기도 하다).
주연급 캐릭터들 만큼이나 [우리 사이 어쩌면]의 조연들도 멋진 퍼포먼스를 보인다. 사샤와 마커스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현재 사샤의 레스토랑을 돕는 베로니카 역의 미셸 버토, 쿨한 아버지 해리의 제임스 사이토, 그리고 사랑까지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여겼던 밉상 브랜든을 연기한 대니얼 대 킴까지 전부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낸다. 그러나 단연 최고를 꼽자면 역시 키아누 리브스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존 윅] 예고편인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예고편에서부터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그는 극중 본인 역으로 출연하는데,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동시에 옹졸하고 치사한 캐릭터로 등장해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랜달 파크와 앨리 웡이 각본과 제작에 직접 참여한 만큼, 영화 곳곳에 아시아 문화와 정서가 묻어 나온다. 김치찌개나 스팸 등의 음식문화는 물론이고 가게에서 맞벌이하는 부모나 가족을 우선시하는 문화, 그리고 "국통을 학교에 들고 가면 왕따를 당한다"는 어린 시절 마커스의 발언 등은 90년대를 미국에서 살았던 동양인들의 모습을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캐나다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시리즈 [김씨네 편의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론 김치찌개와 밥을 먹는데 중국식 숟가락인 탕츠를 사용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훌륭한 문화적 고증(?)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 사이 어쩌면]은 나쁘지 않은, 아니 상당히 즐겁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 뻔함을 신선하게 매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까지 품고 있다. 이게 끝이냐고? 아니다. 즐겁게 영화를 본 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에 랜달 파크의 멋진 랩까지도 들을 수 있으니, 영화가 끝났다고 바로 넷플릭스를 끄는 일은 없길 바란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띵양
제보 및 문의 contact@tailorcontents.com
저작권자 ©테일러콘텐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