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낭만(?), 현실은 꺼림칙한 그들의 관계
영화를 볼 때는 분위기에 취해 넘어갔지만, 돌이켜보면 의문스러운 순간이 있다. 왜 그때 그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이해하거나 용서하는 걸까. 물론 영화 속 가상의 이야기이라 해도 현실로 불러와 생각하면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 없다.
러브 액츄얼리(2003)
낭만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 [러브 액츄얼리]에서 스케치북 고백 장면은 정말 유명하다. 마크는 줄리엣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친구 피터에게 있다. 줄리엣과 피터의 결혼식에서 마크는 두 사람을 찍는 척하면서 오직 줄리엣의 모습만 담아내는데, 그의 마음은 결혼식 비디오를 받으려고 찾아온 줄리엣에게 들켜버린다. 이에 마크는 용기를 내어 집앞으로 찾아가 고백하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의 시그니처 같은 명장면이 탄생했지만, 다르게 보면 마음을 숨기기 급급한 마크의 사랑은 집착처럼 보이기도 한다. 앤드류 링컨은 [워킹 데드] 관련 인터뷰 중 웃으면서 '마크는 스토커'라고 말했는데, 영화에서 마크는 줄리엣에게 키스를 선물로 받았지만 실제라면 상대방에게 당혹감을 넘어 불쾌감을 안길 수 있다.
미녀와 야수(2017)
똑똑하고 아름다운 벨과 운명을 저주하며 은둔 생활을 자처하는 야수의 사랑은 얼핏 보기에도 낭만적이다. [미녀와 야수]는 겉모습보다 내면의 진실성을 강조하며 둘의 사랑을 아름다운 동화로 그려낸다. 동화책에서 툭 튀어나온듯한 비주얼과 생동감 넘치는 뮤지컬 퍼포먼스는 둘 사이에 흐르는 로맨틱한 기류에 이입하게 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벨은 그 시대 다른 여성보다 현명하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음에도 왜 야수를 받아들이는 걸까. 처음 자신의 아버지를 감금했을뿐더러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외모에 내면이 선하다 한들 거친 방식으로 드러내는 야수에게 말이다. 엠마 왓슨은 [미녀와 야수]에서 거론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진보적으로 풀어냈다고 했지만, 벨이 완전히 주체적인 여성이었는지, 둘의 관계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지는 고민이 된다.
패신저스(2016)
미셸은 전에 본 적 없는 캐릭터다. 도무지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강한 이 여성은 평화로운 일상을 파괴한 강간을 당한 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한다.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그 소식을 전할 정도다. 그뿐이랴, 게임 캐릭터에 강간당하는 영상을 이메일로 보낸 부하직원을 찾은 뒤에는 다른 조치를 취하기커녕 수치심을 불러올 모욕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미셸은 오프닝에서 벌어졌던 성폭행을 비롯해 여러 원치 않는 상황에 직면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밀하게 자신만의 성적 일탈을 즐긴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미셸의 뒤틀린 욕망은 스톡홀름 신드롬의 경계도 넘나 든다. 복면을 쓴 채 자신을 범한 걸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끌리고, 그와 위험한 관계를 갖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데, 이때도 미셸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따른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미셸은 어떤 영화에서도 다루지 않는 매혹적인 여성 그 자체다.
베놈(2018)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루저가 된 전직 열혈 기자 에디 브록.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에디는 다시 한번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비리를 밝히고자 몰래 침입실에 잠입했다가 뜻하지 않는 사고로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의 공격을 받는다. 그때부터 난폭하고 흉악한 베놈이 에디의 몸에 기생하는데, 이 둘의 관계가 묘하다.
에디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등 온갖 소동을 일으킨 베놈과 의외로 쉽게 화해한다. 여기에는 난폭한 본능에도 의외로 유순한 성질을 지닌 베놈의 귀여움이 일정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기업 비리를 추적하며 정의로운 기자를 자처했던 에디에게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가 아닐까.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베놈과 비교적 큰 갈등 없이 공생관계로 발전하고 협력하는 둘의 관계에 개연성 있는 서사가 부족해 뜬금없어 보인다. 베놈이 아무리 귀여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