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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노동시간 그리고 중대재해법

조회수 2020. 12. 21. 08: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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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노동을 싼 값에 마구 부리는 삶, 좋으십니까?

네덜란드는 자전거로 유명하다. 국민 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다는 소문도 있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타는 자전거 하나, 기차역에서 회사까지 타는 자전거 하나, 주말에 멀리 나갈때 타는 좀 좋은 자전가 하나, 이렇게 세 개씩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네덜란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유학생 동료에게 물었던 것은 “무엇부터 해야 하나?” 였다. 프랑스의 경우 집을 구하려면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하고, 계좌가 있으려면 체류증이나 주소가 있어야 하는데, 체류증을 신청하려면 주소와 계좌가 있어야 하는 무한루프가 해결 난망한 과제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숙사를 미리 구해서 주소를 확보한 뒤 도착하는 것이 제일 무난한 해법이라 한다.)

네덜란드 주소는 확보해서 도착한 내가 “은행부터 가야 하나, 거주등록부터 해야 하나?”라고 물으니 한인 유학생 동료의 대답은 “자전거부터 사라” 였다. 시청이니 은행이니 돌아다니려면 뭘 타고 다닐 건데?

도시가 그래서 자전거가 많은 것인지, 자전거가 많아서 도시가 그런 것인지 인과관계는 당장 모르겠지만, 과연 도시의 스케일이나 주요 시설들의 위치를 보면, 자가용이나 버스, 트램(tram; 도심 전차)보다 자전거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걸어가면 30분, 자전거 타면 8분, 차로 가면 (일방통행이 많아서 빙빙 돌아야 하니) 10분+@, 주차할 곳 찾아 헤매기, 트램은 우리 도시에는 노선이 몇 개 없었다. 택시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빈 차가 돌아다니질 않는다. 지정된 정류장 아니면 콜택시. 하여 중고 자전거부터 샀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Image by 琛 from Pixabay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그건 자전거를 사는 일이다.

삶의 지혜, 좋은 자전거는 살 필요 없다

내 뒤로 네덜란드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사는 이들에게 했던 격언이 있다. “여기 자전거는 빌려 타는 거다.” “뭔 소리인가, 너무 비싸니 임대를 하라는 말이냐”라고 하는 이들에게 나는 “한 1~2년 타다 보면 진짜 주인이 나타나서 가져간다”고 했다. “좋은 자전거는 비싼 임대료, 중고 자전거는 적당한 임대료다.” 도난당할 게 뻔하니 너무 좋은 걸 살 필요가 없다. 주말 라이딩용의 좋은 자전거는 기차역이나 집 밖에 세우지 않고 꼭 집안에 세워두는 것이 그 동네 삶의 지혜였다.

실제로 그냥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간혹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이가 갑자기 다가와 지금 자기가 타고 있는 걸 삼만 원이면 넘기겠다고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장물일 게 뻔한데, 어느 동네에서부터 타고 왔을지는 몰라도 거래가 성사되면 또 쿨하게 걸어서 사라지던 ‘정키’들. 집은 어디였을지. 홈리스였을지. 어느 나라 국적일지.

자전거를 타다보면 당연히 바퀴에 바람이 빠질 때가 있다. 휴대용 소형 펌프를 가지고 다니거나, 흔히 보이는 무릎 높이의 공기 펌프를 집에 두는 경우도 많다. 웬만한 공공건물 지하나 1층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있고, 조금 큰 규모의 건물에는 자동 공기 펌프가 있어서 큰 힘을 안 들이고 공기를 충천할 수 있다.

출처: 경호
자동 공기펌프가 설치된 학교 건물 지하의 자전거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고치던 장면.

너무 너무 너무 비싼 인건비

드디어 어느날 나의 자전거 바퀴의 튜브에 구멍이 난 모양이다. 공기를 넣어도 바로 새어나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탔던 게 10년은 되었던 것 같아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자전거포에 가서 고쳐달라고 하면 몇천 원 이하의 가격으로 고쳐주셨던 게 기억이 났다. 네덜란드는 인건비가 비싸니 좀 더 비싸겠지 하고 각오하고 찾아갔다. 각오가 부족했다. 삼만 원에 가까운 수리비라니! 아니 그 돈이면 정키에게 장물을.. 아니 자전거를 살 수도 있는데…

튜브 수리킷트는 7천 원 수준이었고, 한 열 번은 구멍을 막을 수 있는 피복 재료와, 플라스틱 지렛대, 쵸크, 사포, 접착제 등이 들어있었다. 역시나 공산품이나 식재료의 가격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저렴하고, 평범한 식당에서의 식대는 2배가 넘는, 인건비의 나라 답군… 하며 사들고 와서는, 낑낑대며 직접 수리를 했다.

어렸을 때 자전거포에서 고치던 방식을 어깨 너머로 봤던 기억을 되살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렛대로 바퀴 외피를 빼 내고, 내부 튜브를 빼내서, 자전거 축과 바퀴 사이에서 공간을 확보한 뒤, 공기튜브를 넣고 바람이 새는 곳을 찾아서 쵸크로 표시를 하고, 사포로 표면을 다듬고, 붙이고…

하이고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끙끙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얌마! 유학 간 게 그 자체로 부귀영화야”라고 죽비를 내려쳐 주었지만.

출처: Nproject
네덜란드 인건비는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비싸다.

작은 깨달음

그러길 몇 번을 했다. 나중엔 익숙해쳐서 시간이 좀 덜 걸렸고, 굳이 물 속에 담그지 않아도 바람이 새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생각했다. 인건비가 이렇게 비싸니 선진국 답긴한데, 그런데 그럼 사람들이 나처럼, 직접 고치게 되면 오히려 수리공의 수입은 줄어드는 것 아닌가? 역시 조상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놈들… (논리 비약)

뭐 생존이 걸린 의문도 아니고 대단히 대단한 철학적 난제도 아니니 이 정도 생각하고 다른 일 하다가 어느 날 또 자전거가 펑크가 났다. 이런 일은 꼭 급할 때 생긴다. 비까지 오면 중간에 자전거를 놓고 가기도 어렵고, 끌멘 타멘 목적지까지 가서 세워 놓고 나니 나중에 집에 돌아갈 일이 아득하다. ‘아, 한 만 원 정도만 해도 그냥 맡기고 싶다’.

중간 지점에 있는 자전거포를 떠올렸다. 내가 어지간하면 맡길 텐데, 비싸서 나 같은 손님이 안 가니 수입이 줄지 않나. 반 값을 받으면 손님이 두 배가 오면 수입이 같을텐데… 그런데.. 3만 원이 아니라 만 오천 원을 수리비로 받고, 한국이 오천 원을 받으면, 당장은 한국의 세 배를 받는 것 같아도 이 동네 물가 수준을 생각하면, 많이 받는 것도 아니네, 결국 한국과 똑같잖아? 선진국이라고 다를게 없네…

하다가 드는 생각은,

‘아, 아니구나, 여기 사람들은 한국에 비해 절반만 일해도 수입이 같은 것이구나!’


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어쩐지 국민소득이 높더라니. 어쩐지 우리가 노동시간 세계 1위를 놓고 멕시코에게 가끔 밀리고 대부분 이기고 있을 때 네덜란드 사람들은 노동시간이 적은 쪽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더라니. 좋겠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출처: 경호
어느 비오던 날 마당에서 자전거를 고치던 장면. 한국으로 치면 3호짜리 다세대 주택에 살았다. 1층 길 쪽은 인도인 부부, 마당 쪽 투룸엔 내가 살았고, 2층과 3층은 복층구조로 대학생 5명의 셰어하우스였다. 유학생에게도 주는 주거보조비 덕분에 마당있는 집의 로망은 실현해보았다. 여름을 한 번 겪고 나서야 한국에 돌아가면 정원사를 고용할 여력이 없으면 마당있는 집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살기 좋은 나라 한국, 돈만 있으면…

너도 나도 인건비가 높으니, 국민소득도 높고 노동시간도 짧지만,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밥도 집에서 해 먹고, 자전거도 직접 고쳐야 하는 것이다. 집 수리도 어지간 한 건 직접 해야 하는 것이고. 그대신 식재료는 싸고, 집 수리 및 장식용품 가게가 한국의 대형마트 처럼 동네마다 있는 배경인 것이다.

내 노동시간이 짧으면 남의 노동시간도 짧다. 혹은 그러기 마련이다. 또는 그래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남의 노동시간이 짧고, 인건비가 비싸다는 건, 내 시간에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그만큼 비싼 돈을 주고 인력을 빌려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이 정말 살기 좋은 나라다.

“한국이 제일 살기 좋아. 돈만 있으면”

해외에 나와본 많은 이들이 동감하는 말이었다. 인프라와 시스템이 한국 만큼 갖춰져 있는데, 또 인건비가 한국만큼 저렴해서 남의 노동력을 쓰기가 편한 나라가 없기에 나오는 말이다. 대개 인프라가 잘 되어 있으면 인건비가 비싸거나, 인건비가 싸면 인프라가 후지거나 하니까.

한국, 돈만 있으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 왜? 인건비가 싸니까.

중대재해법…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제정되어야 한다. 경영인의 인신을 구속하는 게 좋은지, 벌금을 강하게 부과하는 게 좋은지, 현장 담당자를 징계하는 게 효과적인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복되는 산업재해로 죽는 사람을 ‘절반으로 만들자’는 구호보다는 ‘0으로 만들자’는 구호가 나와야 마땅한 것 아닌가.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으로도 모자라서 사람의 목숨까지 갈아 넣어야 굴러가는 경제 성장이라면 그 성장 도대체 왜 하는가.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끼니마다 부모의 살이나 동료의 피가 한 웅큼씩 들어있어야 맛있는 식사인가.

그러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포기해야한다. 맛있는 식사 한끼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불편한 정도로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 모른다. 그래도 바꿔야 한다. 당장 바뀌기는 어렵고, 바꾸는 방법도 쉽지는 않겠지만, 바꿔야 하지 않는가.

출처: 경호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광역버스 안. 몇 년 전 한국에 들어와 받았던 충격 중 하나였다. 출입문 바로 앞에까지 사람이 들어 찬 통근버스가 만약 사고라도 나면 저 문 앞에 서 있는 분(붉은 소매)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걸 감내하고 살고 있을까. 이 상황이 개인의 선택만으로 바뀌진 않는다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 것인가.

나도 밤새워 일하고 받은 쥐꼬리만한 보상으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는 편의점 알바가 밤을 새우는 편의점에 가서, 누군가가 또 밤새 일해서 만든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세상보다는, 나도 적당한 시간을 알차게 일하고 돌아와, 적절한 재료로 밥을 해 먹거나, 가끔은 외식을 할 때 그 곳의 노동자도 합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쪽이 훨씬 더 바람직한 건 사실 아닌가. 더군다나 목숨까지 걸게 해야 하겠는가.

사실 시작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던 시절, 파리의 담배가게가 일요일마다 문을 닫으니 불편해서 물어봤었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면 ‘내가 주말에까지 일해야겠냐’라는 대답이 나올 게 뻔해서 흡연자에게 물어봤다.

“따박 따박 문 닫으니 안 불편하니?”

나온 대답은, 골목 골목 편의점이 24시간 운영되는 한국에 익숙한 나를 뒤흔들었다.

내가 토요일에 살 때 두 갑 사면 되는데.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러면 저 사람이 하루 쉴 수 있는데”.

밤새 편의점에 불을 켜 놓고 매출 좀 더 올리면 국민총생산이야 높게 나올 수 있겠지.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어느쪽인가. 답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요구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포기할 것을 포기해야 하며, 각오할 것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이 좋은 쪽인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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