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승리자에게

조회수 2020. 4. 17. 17: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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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정당' 사건을 중심으로 4.15 총선을 회고하며
“승리만이 미덕이고 그것만이 고취될 때
가장 긴요한 미덕은 실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승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나쁜 승리라면.

나는 과연 실패할 수 있을까?“

- 정현종, 시작 노우트 1975 –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중에서

오래전 어느 시인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상황이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총선이 바로 그 상황이다.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승리이자 누군가에게는 초라한 패배일 4.15 총선은, 나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무서운 야만의 정글에 불과하다. 

여기에 어떤 승리의 안식도 없고, 여기에 어떤 떳떳한 패배의 인정도 없다. 패배한 자는 그저 반성 없이 몰락했고, 승리한 자도 그저 환호할 뿐 성찰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게 보인다.

준연동형 비례선거제가 불완전한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위성정당’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미래통합당을 용서할 수 없다. 미래통합당은 ’위성정당’이라는 역사적 치욕을 발명했고, 선관위는 그것을 용인함으로써 이 괴물에게 생명을 부여했다. 미통당을 나는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의 패배가 아주 조금 위안이 되긴하지만, 그 패배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주 아주 부족하다. 해체만으로도 부족하고, 패배만으로도 부족하다. 이들은 보수가 아니라 그저 정치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괴물이며,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인 민주주의의 적이다. 너희들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다(꼼수에 꼼수를 더해 이 아수라장에 ‘빨대’ 꽂기를 시도한 어떤 유사정치집단도 마찬가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더불어민주당은, 그 난감함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자신도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선거에서 나는 민주당을 선택했고, 그 선택들 중에는 이른바 전략적 선택, 비판적 지지도 있었지만, 이번 총선처럼 씁쓸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지역구에서는 민주당을 선택하도록 강제되었지만(1,2.7 중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번호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이것이 정말 승리라면, 이것을 정말 승리라고 느낀다면, 촛불 혁명 주체로서의 우리는 그저 승리만이 유일한 미덕인 정치 동물, 아니 정치 괴물이라고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이낙연 당선자가 후보 유세에서 표현한 비유인 “동물국회”처럼, 4.15 총선은 포식자만이 승리자이며 그 포식자가 되기위해 원칙과 철학 따위는 시궁창에 던져버려도 전.혀.상.관.없.음.을 증명한 역사적 치욕에 불과하다.

위성정당은 치욕의 언어다. 그 언어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그 정당 소속당원들도, 모정당도, 방송도, 신문도, 평론가도, 나도, 당신도 쓰는 언어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체이고,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헌법을 신뢰하고 그 헌법정신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위성정당이라는 말이 생명의 언어로 방송되어선 안되었고, 선거에 나와서 국민의 선택을 요구하는 일은 존재해선 안 됐다. 

하지만 그런 일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졌고, 승리자의 환성과 패배자의 한숨 속에서 누구도 이 치욕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방송도 신문도 SNS도 승리와 패배에만 집착할 뿐 원칙의 파괴와 그 상처에 관해선 말을 아낀다.

하지만 승리자여, 이 승리를 조금이라도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면, 촛불의 개혁과 세월호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 꼼수를, 이 치욕을 피치 못할 선택으로만 여긴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돌아보는 것으로 승리의 환호를 대신해야 한다. 그것이 승리자의 미덕이며, 의무다. 

2020 총선에서 벌어진 ‘위성정당’ 사건은 그저 사소한 꼼수나 해프닝이 아니다. 이것은 정당제도를 농담으로 만든 사건이고, 무엇보다 유권자로서의 존재를 부정한 사건이다. 그저 국민이 투표하는 기계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저 “민망한 일이 벌어졌”다고 슬쩍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원칙이 중요한 건, 성문이든 관습이든 그 몇 줄의 규정과 그 속에 담긴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사실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원칙이라는 거, 그리고 그 원칙들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라는 건 우리가 동물이라는 걸 위장하는 고도의 속임수 체계에 불과하다. 

그 속임수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건 위대한 희생자들이며, 그 피 위에서 세워진 법칙과 규칙들이다. 특히 헌법제도는 그 피와 희생의 역사 위에서 세웠졌다. 민주주의공화국의 헌법제도, 그 권력구조의 중핵을 차지하는 정당제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위대한 눈속임이다. 그렇게 철학이 탄생하고, 교양이 탄생하고, 그 빌어먹을 휴머니즘이 탄생했다. 그런 맥락과 의미에서 인간은 발명된 존재다. 더는 신의 노예가 아니고, 더는 재산에 불과한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다.

 이 속임수가 탄로나면, 그 원칙이 깨지고, 철학과 역사의 교훈이 증발하면 무차별 현상이 발생한다. 내적 질서는 무너지고, 오직 생존과 승리만이 유일한 정의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정치적 인간은 멸종하고, 정치적 동물만이 생존할 것이다. 나는 그런 ‘동물의 왕국’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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