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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낸 의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조회수 2018. 11. 13. 19: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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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 구속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 관한 한 의사의 답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루카 복음서 제10장 25-37절).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한 행인이 강도를 만나서 길에 쓰러져 있는데 그 모습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발견한다. 하지만 이 제사장은 짐짓 못 본 체하며 가던 길을 간다. 잠시 후 사마리아인도 그 행인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달랐다. 쓰러진 행인에게 응급 처치를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완쾌될 때까지 돌봐달라고 하며 필요한 돈을 맡긴다.

당시 제사장은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이란 사회적으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던 계층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비추어보면 제사장과 사마리아인은 각각 국회의원과 동남아 노동자 정도로 볼 수 있다. 국회의원이 자기 지역구의 행인이 다쳐서 쓰러진 것을 못 본 척하며 지나갈 때 동남아 노동자가 이를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고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이나 재산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에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G. Conti (18세기)

두 개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조금 다른 의미로도 활용된다.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이라는 것이다. 이 법은 사실 두 가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쓰인다.

1.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면 그 결과가 나쁘게 되어도 정상참작을 해주자는 것이 그 하나고(과실범 면책), 


우리나라에서 이에 해당하는 법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로, 제5조의2(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에서 이를 규정하는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는 형사책임을 면하거나 감한다. (편집자)

2.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자신에게 피해가 없이 도와줄 수 있음에도 도와주지 않으면 처벌하자는 것이 나머지 하나다(괘씸죄 처벌). 

편의상 앞엣것을 ‘과실범 면책’, 뒤엣것을 ‘괘씸죄 처벌’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가지 유의할 점은 성경의 원래 이야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행인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과실범 면책’의 의미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쓰고 있다. 당시 사마리아인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마리아인의 입장일 뿐이고, 오늘날 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들은 이 비유가 자못 반갑다. 자신들의 방어논리로 ‘과실범 면책’을 의미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말한다. ‘환자를 위해 선한 의도로 치료하다 벌어진 의료사고이니 결과적으로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그런데 지금 선한 의도라고 했나? 선한 의도? 정말 선한 의도에서 치료를 했을 뿐인가.

선한 의도가 성립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 뜻이 오로지 이타적이어야 한다. ‘과실범 면책’의 근거는 이타적 희생정신에 대한 사회적 존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의 진료행위가 이타적 희생정신에 의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나억울 vs. 나황당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나억울’이라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을 쫓던 꼬마가 차 앞으로 뛰어든다. ‘나억울’은 꼬마를 치지 않기 위해서 급히 핸들을 꺾는다. 다행히 꼬마 아이는 다치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후 ‘나억울’은 길 한쪽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에 충돌한다. 아이를 피하려고 급히 핸들을 꺾다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벌어진 일이다.

파손된 차의 주인 ‘허황당’이 황당한 표정으로 뒷목을 잡고 나온다. ‘나억울’은 이 상황이 억울하다. 하지만 ‘나억울’이 억울한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일으킨 사고에 대해 ‘허황당’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가, ‘허황당’이 차에 타고 있다가 ‘나억울’의 차에 부딪혀 사망했다면 어떨까. 꼬마 아이를 살리려고 했으니 선한 의도를 생각해서 ‘나억울’을 봐주어야 할까.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억울’이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나억울’이 꼬마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은 행동은 사실 알고 보면 이타적인 선한 의도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억울’은 운전자라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노력한 것일 뿐이다. 핸들을 튼 것은 꼬마를 위한 행동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나억울’이 더 주의해서 운전했다면 얼마든지 꼬마를 피하면서도 ‘허황당’의 차를 파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억울’이 “아이를 구하려다가 그랬으니 적당히 봐주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의사는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이제 의사들의 모습으로 돌아와 보자. 의사들은 자신들의 의술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의사가 아닌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는 큰 오류가 담겨있다.

의사는 오로지 이타적인 선의로 의술을 베푸는 게 아니다. 의사는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의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배워서 필요한 일을 해주고 그 덕분에 의사도 먹고산다. 누가 누구에게 베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의사들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우리 의사들에게도 다행이다.

그런데 의사들이 이걸 마치 대단한 인류애를 펼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을 하지 않는 거다. 원래는 사람들에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 건데 해줬으니 고맙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오만한 생각이다. 택시기사는 운전 기술이 있으니 그걸 활용해서 먹고 사는 거고, 의사는 의료 기술이 있으니 그걸 활용해서 먹고 사는 거다. 의사가 의술을 베푼다는 말은 택시기사가 운전술을 베푼다는 말처럼 어색하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우리는 택시기사에게 ‘운전술을 베풀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는가. 혹은 택시기사나 택시기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런 일반적인 (자)의식이 있을까. 의사와 택시기사는, 직업과 책임의 본질에서,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의사들이 진료 중에 의료사고를 일으킨 것은 ‘과실범 면책’으로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의사들의 진료는 순수하게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 희생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 자신의 직분을 하는 것뿐이다. 근데 그걸 제대로 못 했다면?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해야 한다. 죄가 무겁다면 처벌받아야 한다.

나는 위선이 싫다.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을 마치 남을 위한 봉사인 것처럼 포장하는 건 위선이다. 그래서 의사들이 의료사고를 일으키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앞세워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보면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행인을 구해줄 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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