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의 분노: "요점만 말해, 이 바보야!"

조회수 2018. 5. 8. 09: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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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공문서는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글쓰기로 악명이 높다.

최근 청와대에서 발의한 헌법 개정안은 ‘읽기 쉬운 문장’으로 작성되어 화제가 되었다. 한자를 최대한 우리말로 풀어 쓰고, 일본식 문투를 우리식 문투로 바꾸고, 가능한 한 능동형을 써서 일반 국민 누구나 쉽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고친 헌법과 이전 헌법을 나란히 비교해보면, 30년 전 제정된 현행헌법은 민주화와 더불어 발전한 오늘날 시민의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명확한 글쓰기는 민주주의의 강력한 무기

역사를 돌아보면 어떤 나라든,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은 한결같이 글쓰기를 통해 문맹계층을 배제하고자 노력해왔다. 부조리한 권력과 권위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타락한 정치인, 관료, 법률가, 학자들은 글을 명확하고 읽기 쉽게 써야 한다는 가치를 끝없이 폄하하고 조롱해왔다.

미국 역시 건국초기부터 이러한 엘리트주의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초기에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배제했고, 문맹률이 낮아지자 이후엔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남용하여 영어만 아는 사람들을 배제했고, 그 다음엔 라틴어를 흉내 내어 만든 ‘명사화구문’으로 가득한 표준영어(Standard English)를 내세워 진입장벽을 세웠다. 수십 년에 걸쳐 교육을 받고 엘리트의 언어와 그들의 가치관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만의 이너서클에 들어갈 수 없다.

일부러 썼든 무심코 썼든, 난해한 글은 기본적으로 차단과 배제를 추구한다. 이러한 배타성은 시민사회가 존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소통과 신뢰를 좀먹는다는 측면에서, 추상적인 단어로 의미를 부풀린 현학적인 글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윤리를 부정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공문서는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글쓰기로 악명이 높다. 심지어 이러한 글쓰기 관습을 조롱하는 의미로 ‘관료주의 문체’를 지칭하는 말(‘bureaucratese’ 또는 ‘officialese’)이 생겨나기도 했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도무지 읽히지 않는 공문서에 분노하여 정부문서를 쉽게 작성하라는 대통령 명령(Presidential Act)을 내리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보고서를 들고 온 보좌관을 이렇게 소리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40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1981-1989)
“요점만 말해. 이 바보야!”

“Keep It Simple, Stupid!”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짧고 간결하게 글을 쓰라는 구호만 있었지, 글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잡한 글쓰기는 미국 정부에서 만들어내는 공문서와 동의어처럼 여겨졌다.

1993년 취임한 빌 클린턴 대통령 역시 레이건과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수한 보고서들 속에서도 유독 명확하면서도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보고서들을 발견한다. 시카고대학 출신 보좌관들과 자주 일했던 클린턴은 어느 날 보고서를 읽다가 이렇게 묻는다.

“시카고대학에서는 글쓰기로 골치 썩지 않는가?”

조셉 윌리엄스의 [스타일 레슨] 

세계에서 가장 학구적인 대학이라 불리는 시카고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카고대학 영문학과 교수 조셉 윌리엄스는 1981년 《스타일 레슨 Style: Lessons in Clarity and Grace》을 출간하고, 이 책을 바탕으로 뜻을 함께 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리틀 레드 스쿨 하우스(The Little Red Schoolhouse)라고 하는 혁신적인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스쿨하우스에는 시카고대학의 학부생, 대학원생들은 물론,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교수와 교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출처: 시카고대학 도서관

입소문이 퍼지면서, 시카고에 밀집해 있는 세계적인 로펌에 소속되어 있는 변호사들, 다국적 기업의 임직원들, 연방정부의 공무원들도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스쿨하우스에 찾아온다. 첫 3년 동안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윌리엄스는 커리큘럼을 더욱 세부적으로 조율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렇게 완성된 커리큘럼은 고스란히 시카고대학의 공식 라이팅 프로그램으로 채택된다. 지금도 리틀 레드 스쿨 하우스(LRS)는 시카고대학 라이팅 센터의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윌리엄스의 글쓰기 프로그램의 성과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의 원리를 터득하고 이를 실제 글쓰기에 적용하면서 훨씬 명확하고 읽기 쉬운 글을 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정작 개선된 글을 써내더라도 그것을 알아보고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83년 논문 작성을 지도하고 심사하는 교수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라이팅 인턴(Writing Interns)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2년 동안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카고대학의 많은 학자들이 명확하고 아름다운 영어 글쓰기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하워드 베커는 1986년 《사회과학자의 글쓰기》라는 책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시카고대학에서 시작된 조용한 글쓰기 혁명

1985년 라이팅인턴 프로그램을 끝낸 뒤, 윌리엄스는 이제 미국 전역으로 자신의 글쓰기이론을 전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미국정부에서 운영하는 인문학 진흥기관 NEH(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의 지원을 받아 소위 ‘여름방학 글쓰기캠프’를 매년 개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명성을 듣고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수들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 학자들, 기업인들, 법률전문가들, 공무원들이 모여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로버트 와인스버그는 1990년 《Writing Up Research》라는 탁월한 글쓰기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출처: 조셉 윌리엄스

글쓰기에 대한 혁신적인 통찰과 이러한 통찰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한 윌리엄스의 열정적인 헌신 덕분에, ‘문법’과 ‘어법’을 따지는 ‘규칙’에 기반한 기존의 글쓰기교육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대신 ‘문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중심으로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글쓰기교육이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시선이 아닌 독자의 시선에서 접근하는 글쓰기철학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미국 대학들의 글쓰기교육프로그램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었으며, 기업과 정부의 다양한 보고서와 매뉴얼 작성 프로세스, 평가기준은 훨씬 체계화되고 정교해졌다. 특히 시카고의 대형로펌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간 법률분야의 글쓰기 혁신은 실로 미국의 글쓰기풍경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꿔 놓았다.

레이건은 “요점만 말해, 이 바보야”(“Keep It Simple, Stupid!”)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어떻게 써야 글이 간결해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써야 한다’는 구호만 오랜 시간 난무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시카고대학의 한 연구실에서 나왔고, 머지않아 미국의 글쓰기 전통을 바꿔 놓았다.


이 글은 필자가 2018년 4월 출간한 책 [스타일 레슨]에서 발췌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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